藝文史 展示室

살아 숨쉬는 실루엣… 렌즈 위에서 춤추다

yellowday 2015. 4. 30. 08:14

입력 : 2015.04.30 03:00

[사진작가로 변신한 前 발레리노 박귀섭]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공연 포스터 맡아
"동양인의 아름다운 線, 사진으로 영원히 남기고 싶어"

기둥서부터 뻗어나간 뿌리와 가지가 멈춰 있어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영락없이 잔가지 그득한 나무인 줄 알았는데 한 걸음 다가가 자세히 보니 웬걸, 나무가 사람들 몸으로 꽉 차 있다. 실제 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국립발레단 남녀 무용수 10명이 몸을 포개고 팔다리를 비틀어 한 그루 거대한 나무를 만들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다. 작품 제목은 따로 없다. 그냥 '쉐도우(SHADOW) 시리즈―2번'이라고 부른다.


	서울 종암동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박귀섭은“정작 내가 사진 찍히는 모델이 되면 부끄럽고 어색하다”고 했다.
서울 종암동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박귀섭은“정작 내가 사진 찍히는 모델이 되면 부끄럽고 어색하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일부러 제목을 달지 않아요. 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가 작품 제목이 된다고 믿어요." 발레리나가 물 위에 뜬 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작품 앞에서 사진작가 박귀섭(31)이 말했다.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 오르는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포스터 사진도 그의 작품이다. 벌써 4년째 국립발레단 사진을 맡고 있다. 그간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백조의 호수' '교향곡 7번' 포스터도 그의 작품이었다.

프로 작가이지만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을 졸업하고 2006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솔리스트(주역을 맡을 수 있는 등급)로 활약한 발레리노. 2007년 뉴욕 인터내셔널 발레 대회에서 동상을 받을 만큼 실력도 뛰어났다. 그럼에도 2010년 발레를 그만뒀다.

"춤추는 것도 뜻깊지만 내 마음대로 담을 수 있으면서 영원히 남길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쏠렸죠. 그때 사진이 눈에 들어왔어요."

집 앞 스튜디오(논현동)에 무턱대고 찾아가 어깨너머로 알음알음 배웠다. 발레단을 그만뒀다는 사실에 고향(목포)에 있던 부친이 대로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서럽게 울며 반드시 성공하리라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인 발레에 집중했다. "발레리노일 때부터 사람들이 발레에 대해 갖는 편견을 바꾸고 싶었어요. 민망한 부위가 드러나는 타이츠만 보고 큭큭 웃거나 벌칙 같다고 놀리는 게 듣기 싫었어요. 발레의 본질은 그게 아니에요. 무용수들은 겉으론 깡말라 보여도 속은 잔 근육으로 가득 차 있어요. 흘린 땀과 눈물이 그 안에 베어있어요."


	국립발레단 무용수 10명이 출연한‘project?SHADOW #2’.
국립발레단 무용수 10명이 출연한‘project—SHADOW #2’. /박귀섭 촬영
움직임보다 실루엣에 흥미를 느낀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다운지 귀신같이 포착해내는 게 장점이다. 무용수들이 평소 연습과 운동으로 다진 의미 있는 몸짓과 순간의 동작을 유려한 곡선으로 뽑아낸다. 길게 자라난 뿌리, 악보 속 음표,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 백조가 알고 보니 뛰고 돌고 팔을 뻗는 무용수들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발레 사진들이다.

2011년 사진에 뛰어든 지 1년 만에 강동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해부턴 쉐도우 시리즈도 시작했다. 모두 열다섯 작품을 계획 중인데 현재까지 열세 작품을 완성했다. 나무처럼 보이는 쉐도우 2번은 러시아 출판사가 펴내는 소설의 표지, 미국 음반사 소니가 제작하는 음반 표지로 쓰기로 최근 계약했다.

서울 종암동의 50평 지하에 세 들어 촬영 중이지만 2013년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 모델이 필요하다 말하면 냉큼 달려와 주는 국립발레단 동료들이 가장 큰 재산이다. "'콩쥐팥쥐' '흥부와 놀부' 같은 우리나라 전래동화, 나아가 일본·중국 동화까지 범위를 넓혀서 동양인 특유의 고운 선이 잘 드러나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뚜벅뚜벅 미련하다 싶을 만큼 우직하게 하고 싶은 사진 찍는 사람이 되는 게 제일 큰 꿈입니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