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숨은 왕>, 이한우 지음, 해냄 (2010)
얼마 전부터 시작한 KBS사극 <징비록>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구봉 송익필 (박지일 분). 정여립사건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서인(西人)의 책사(策士). 묘하게도 사극에서는 이런 종류의 책사들이 주목을 받는다. 그의 이름이 생소했던지, 그날 드라마가 끝난 후 다음 등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송익필’이 인기검색어에 올라 있었다.
내가 ‘송익필(1534~1599)’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 덕분이었다. “내가 요새 재미있는 사람에게 푹 빠져 있는데, 송익필이라는 사람이다. 경기도 파주 땅에서 자기들끼리 서클을 형성한 일단의 선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이, 성혼, 정철, 송익필이었다. 후일 서인의 뿌리가 된 이 네 명 중에서 서클을 주도한 것은 송익필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5년쯤 전이었다. 얼마 후 이한우 부장은 송익필의 이야기를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그때 읽었던 책을 이번에 다시 꺼내 읽었다.
<조선의 숨은 왕>의 서문에서 저자는 송익필을 “선조 이후 조선 역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송익필을 ‘조선에 예학(禮學)의 씨를 뿌린 송시열 이상의 사상가, 정철을 능가하는 시인, 이이 이상의 정치가, 조정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산림(山林)의 전통을 창시한 불세출의 책략가, 조선 중기의 통치원리 대부분을 만들어낸 사상계의 군주’라고 평하면서 “그를 모르면 당쟁을 물론이려니와 조선 중-후기를 장악한 서인과 노론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대단한 인물이 어쩌다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된 것일까? 이유는 그의 아버지 송사련에게 있다. 송사련의 외할머니 중금이라는 여자는 기묘사화때 조광조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좌의정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의 비첩(婢妾)이었다. 중금의 딸 감정도 천인신분이었다. 감정이 말단 군인 송인이라는 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송사련이었다. 송사련은 천인의 피가 흘렀지만, 서얼에게 관대했던 안당의 가풍 덕분에 벼슬길에 나가 종5품 관상감 판관이 되었다.
1521년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 안처근 등이,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기묘사화 이후 정권을 잡고 있던 남곤, 심정 등 권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고변(告變)했다. 자신의 주인 집안이자 이복형제들을 고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안당, 안처겸, 안처근 등이 죽음을 당했다. 그 대가로 송사련은 출세가도를 달려 중추부 첨지사에 이른다.
하지만 후일 선조가 즉위하고 조광조를 추앙하는 사림들이 정권을 잡자, 주인집안을 배신하고 권신에게 아부하여 출세한 송사련의 자식이라는 것은 송익필에게 큰 멍에가 되고 만다. 과거에 급제했지만 대과(大科)를 치르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초야에 묻힌 송익필은 그를 높이 평가한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을 제자로 맞아들이는데, 김장생은 바로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사회를 지배한 예학의 창시자가 되는 인물이다.
당시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벼슬길이 막힌 송익필은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이이, 성혼, 정철 등을 움직이면서 서인의 책사로 활약한다. 이 과정에서 송익필은 서인이면서도 동인들과의 화합을 주장하는 이이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파주의 친구들 가운데 송익필과 가장 뜻이 잘 맞은 사람은 직정적인 성격의 정철이었다.
서인의 정치적 행동의 배후에 송익필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동인의 영수 이발은, 안당의 후손들을 움직여 “안당 집안에서는 송사련을 면천(免賤)한 적이 없으므로, 송익필 형제 등 후손들을 안씨 집안의 노비로 되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게 한다. 이때 노비행정을 관장하는 장예원 판사로 안당 일가의 손을 들어준 사람이 정윤희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동생 정윤복이 바로 다산 정약용의 선조이다. 남인(南人)이었던 정약용이 평생 노론의 박해를 받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집안내력 때문이었다.
결국 하루아침에 노비 신분으로 추락한 송익필은 추노꾼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책략은 멈출 줄을 모른다. 동인의 몰락을 가져온 정여립 사건은 바로 송익필의 작품이었다. 송익필의 절친인 정철이 정여립 사건을 다스리면서 송익필에게도 볕이 드는 듯 싶었지만, 건저(建儲)문제로 정철이 실각하자 송익필에게는 다시 고난이 닥쳐온다. 유배생활에 이어 임진왜란이 터지고 그는 피란생활을 하다가 1599년 충남 당진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하지만 송익필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죽은 후 24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반정을 주도한 이귀, 김류, 신경진, 구굉, 최명길 등은 송익필이나 그의 수제자 김장생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효종~숙종 때 서인(노론)의 영수로 활약하는 송시열은 김장생의 수제자였다. 저자인 이한우 부장이 그를 ‘사상계의 군주’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저자는 송익필은 사상가, 정치가, 시인, 책략가라고 평했지만, <조선의 숨은 왕> 속의 송익필의 모습은 책략가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선조 시절 당쟁의 초기 모습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권신들에게 저항하고, 그들의 탄압을 받다가,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치전면에 나서게 된 사림들이 이내 동서로 나뉘어서 싸우는 모습은 어딘지 낯익다.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절대선(絶對善)으로 여기고 이준경 등 앞선 세대의 고민을 우습게 아는 신진 사림들의 모습은 꼭 노무현 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이라는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우면서 철부지 이념놀음에 여념이 없던 386세대 정치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다가 어느덧 자신들이 기득권세력이 되어버리고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싸우는 모습 또한 지금의 여야 혹은 새민련 내 친노-반노세력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동인과 서인들은 말로는 군자와 소인을 가르고 의리와 시비를 논하지만, 그 속에 민생이나 안보에 대한 걱정은 없다. 그 결과가 임진왜란이었다.
영의정 이준경이 죽기 전 선조에게 올린 상소 속에 그려진 임금 선조의 모습도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영기(英氣)를 드러내어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서 그쳐야지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영의정 이준경이 죽기 전 선조에게 올린 상소 속에 그려진 임금 선조의 모습도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영기(英氣)를 드러내어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서 그쳐야지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송익필 등이 그렇게 치열하게 몰두했던 당쟁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굴절된 삶 때문에 좌절했던 송익필은 그 반성 위에서 ‘직(直)’과 ‘예(禮)’를 자신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고, “백성의 삶이 곧 곧음”이라면서 ‘곧음’이 바탕을 둔 민생정치를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추상적이다. “사물이 곧지 못하면 그것을 바로잡아서 곧게 만들어야 한다. 곧지 못하면 도리가 드러나지 못하니 진실로 곧고자 해야 한다”는 송익필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부국강병의 방략도, 민생에 대한 고민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 송익필의 제자들이 만든 인조 정권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참극을 자초한 장본인들 아니었던가?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의 제목을 ‘24년 후, 드디어 그의 세상이 열리다’라고 붙였지만, 송익필의 철학을 사실상 국시(國是)로 받든 서인세력이 집권한 조선 후기 300년의 역사는 호란과 유혈 당쟁, 그리고 망국으로 이어지는 창피한 역사였다. “가령 동인이 군자의 이름을 얻고 서인이 소인의 이름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방의 곤궁한 백성들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라는 율곡 이이의 절규가 더 울림이 큰 것도 때문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송익필이라는 사람을 재현하기 위해 저자는 그답지 않은 모험을 시도한다. 일종의 팩션(팩트+픽션)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송익필 관련 문집에서 취한 사료(史料)를 뼈대로,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등장인물들의 만남이나 대화를 창작해 집어넣은 것이다. 다만 그러한 대화들도 근거할 만한 사료에 바탕을 두었다. 팩션이라는 형식 덕분인지, 송익필이라는 생소한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