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識있는 서재

영국을 ‘황금의 시기’로 이끈 외로운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1)

yellowday 2015. 2. 3. 18:45
‘천일의 앤’, 앤 볼린의 딸. 아버지 헨리 8세와 함께 영국 역사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군주.
 
종교문제로 어지럽고, 바닥난 국고에 프랑스의 칼레마저 잃어 자신감을 상실한 유럽의 이등국가를 물려받아 황금의 시기(golden age)로 이끌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마련해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애국심을 심어준 여왕. 한 성깔 했지만, 중요한 나랏일에는 침착하고 계산적이었던 여왕. 남자들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했던 가냘픈 여자였지만 ‘내 비록 사자는 아닐지라도, 사자의 자손이며 사자의 심장을 지니고 있다(I may not be a lion, but I am lion’s cub and I have lion's heart)’ 고 외치며 유럽의 강대국들을 떨게 한 그녀.

나라와 국민이 나의 남편이라고 했던 외로운 처녀여왕.

1533년 그리니치 궁전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r. 1558~1603)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여왕이었지만, 한 여자이기도 했습니다.
 
 
‘입던 옷이 작아졌으니, 새로운 옷들 좀 보내주세요’ - 서러웠던 어린 시절
본문이미지
▲ 소녀시절의 엘리자베스 1세 / 그림 : 위키피디아
엄마 ‘천일의 앤’의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던 엘리자베스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딸을 끔찍이 사랑한 엄마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 있었는데, 2살 때 엄마가 반역•근친상간•마녀행위로 참수되면서 서러운 어린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 아빠의 결혼이 무효가 되면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 취급을 받게 되어 호칭이 공주(princess)에서 귀부인(lady)으로 격하되었고, 입던 옷들이 이제 다 작아졌으니 새로운 옷들을 보내달라고 가정교사가 헨리에게 편지를 써야 할 정도로, 앤 볼린의 사형 11일후에 재혼한 헨리에게 딸 엘리자베스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외로운 엘리자베스는 역시 엄마없이 자라야 했던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배다른 언니 메리와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엄마를 둔 메리와 영국인 엄마를 둔 엘리자베스는 집안 연줄도 다르고 엄마한테 물려받은 종교도 달랐고, 나이 차이도 17살이나 되고 성격도 많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는 나이도 비슷하고 종교도 같았으며 둘 다 학문을 좋아해 같은 가정교사들에게 교육 받으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친구는 엘리자베스랑 나이가 열 몇살 밖에 차이 나지 않았던 세 번째 새엄마 캐서린 하워드였습니다. 캐서린은 그녀의 의붓딸을 귀여워해 저녁식사 때 맞은편에 앉게 하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놀아주었습니다. 항상 왕실의 그늘에서 눈치만 보며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자라왔던 엘리자베스에게 이것은 참 반가운 변화였을 텐데, 2년이 채 되지 않아 캐서린 역시 엄마처럼 간통과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이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친구 로버트 더들리에게 ‘나는 커서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생 첫 8년 동안에 엄마를 잃고 세 명의 계모 중 두 명이 죽었으니, 어린 마음에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비정상적인 아이디어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새엄마의 남편, 토머스 시모어의 추태
본문이미지
▲ 토머스 시모어 / 그림 : 위키피디아
헨리 8세가 죽자마자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었던 캐서린 파는 예전부터 마음이 있었던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해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왕실을 나와 첼시로 이주했고, 토머스가 엘리자베스의 가디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디언은 무슨 가디언. 큰 키와 건장한 체구에 옷을 잘 입고 목소리가 멋있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속이 빈 가벼운 사람이었다는 이 40대 중년의 남자가 당시 14살이었던 엘리자베스에게 온갖 추태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잠옷을 입은 채로 엘리자베스의 침실로 기어들어가 엘리자베스를 간지럼피고 엉덩이를 살짝 때리며 잘 잤냐고 물었으니, 엘리자베스는 토머스가 오기 전에 일어나서 옷 입고 있을 수 있도록 점점 더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림: 토머스 시모어Source: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해괴한 행동들 좀 그만두라’ 며 말렸지만, 토머스는 ‘악의 없는 장난인데 뭐 어떠냐’ 며 뻔뻔하게 나왔고, 이런 남편을 말리기는커녕 캐서린 파는 같이 엘리자베스를 간지럼 태우고 엘리자베스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를 갈기갈기 자르는 것을 도왔다고 합니다. 정숙하고 신앙심이 깊어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던 왕비였던 여자는 어디에 갔을까요?

이러다 어느 날 토머스에게 안겨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샘이 났는지,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서야 느꼈는지, 엘리자베스의 평판을 위해서라며 캐서린은 엘리자베스를 다른 집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이 죽은 후에도 토머스의 추태는 계속되었습니다.

토머스는 어린 왕 에드워드 6세가 죽기 전, 용돈을 찔러줘가며 자기편으로 만드려고 하더니, 급기야는 에드워드를 납치해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키고 자신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을 피다가 반역죄로 잡혔습니다. 토머스와의 관계 때문에 사건에 연루된 엘리자베스도 이때 런던 타워에 갇혀 심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풀려났지만 엘리자베스는 토머스가 처형된 이후 한동안 앓았다고 합니다. 15살 사춘기 소녀에게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일이고, 카리스마 있고 매력 있었다는 토머스를 엘리자베스가 조금 좋아했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토머스의 추태에 대해 ‘다 장난이니 괜찮다’는 식으로 말할 때도 있고 불쾌해 할때도 있었다니,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진도가 나갔거나 성추행을 당하기라도 했다면, 토머스의 부적당했던 행위들도 후 엘리자베스의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토머스가 캐서린 파에게 독약을 먹인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토머스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등 별의별 소문이 자자했기에, 엘리자베스는 떨어진 명성을 회복하고 처녀 이미지를 되살리기 위해 다시 왕실로 돌아왔을때 보석이나 다른 장식품으로 꾸미지 않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단정한 옷만 입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의 눈이 자신보다 왕관에 있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많은 의심을 받지만, 증명될 것이 없다’ - 심문받는 엘리자베스
메리와 스페인의 펠리페의 결혼에 반대해 일어난 와이어트의 반란 때 엘리자베스는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충분해, 또 한 번 들어가면 엄마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다시 나오지 못했던 런던 타워에 갇혔습니다. ‘나는 많은 의심을 받지만, 증명될 것이 없다’며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던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자비와 와이어트의 진술로 타워에서는 풀려났지만, 옥스퍼드셔의 우드스톡(Woodstock)에서 많은 감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 년간 감금생활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런던에서 우드스톡으로 이동하는 길에 많은 백성들이 나와 선물을 주고 환호를 보냈지만, 과연 엘리자베스는 여왕이 될 수 있을까요?
 

참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본문이미지
▲ 대관식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 / 그림 : 위키피디아
많은 이들이 엘리자베스에게서 여왕이 될 권리를 앗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어떻게 해도 일어납니다. 블러디 메리는 숨을 거두기 전에 엘리자베스를 상속자로 임명했고, 1558년 참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다가 여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스가 시편 118장 23절을 읊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우리 눈에 놀라운 일이로다(It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lous in our eyes).’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행해진 대관식때 보여진 그녀의 선하고 우아한 자태는 보는 사람들의 감명을 자아냈습니다. ‘제 의지와 제게 부여된 권한으로 지금까지의 어느 군주보다도 당신들에게 잘하겠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저의 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겸손하고 헌신적인 여왕을 런던 시장과 시민들은 오르간을 치고, 트럼펫을 불고, 북을 두드리고, 종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의 결혼 문제
엘리자베스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 튜더 왕조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고, 귀족들이 왕위를 두고 싸우는 장미전쟁 같은 내란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 모든 사람들이 여왕이 신속히 남편을 찾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것으로 예상했고, 엘리자베스가 홍역을 앓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후로는 더욱더 결혼 문제가 강조되었으며, 유럽 최고의 신붓감에게 여기저기서 혼인신청이 들어왔지만, 우리는 엘리자베스가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기억됨을 알고 있습니다.

언니가 죽기 전부터 관심을 보였던 형부 펠리페의 신청은 한 번에 거절했지만, 다른 구혼자들은 희망을 가지게 내버려 두고 신하들에게 한명 한명 장단점을 따져보게 하며 혼인협상을 외교의 무기로 삼았던 엘리자베스가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한명도 맘에 들지 않았다’ 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왕의 결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만큼 결혼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커서 맞는 사람 고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실질적으로 영국의 왕이 되는 것이니 너무 강력한 나라와 손을 잡으면 그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너무 약소국이면 영국이 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돌봐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메리가 펠리페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반란이 일어났던 것처럼 국민들이 싫어하는 결혼은 여왕의 인기와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상대 나라의 세력뿐 아니라 종교도 중요했으나, 종교가 같다고 영국인과 결혼하는 것도 이상적이지 않았던 것이, 영국 귀족들은 (당연히) 여왕 수준에 못 미치는 데다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친다는 장점이 없었습니다. 따라 적합한 사람은 하늘의 별따기, 즉 없음 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