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識있는 서재

악비(岳飛)-중국 남송때의 장군

yellowday 2014. 11. 25. 07:10
악비(岳飛)
1103년 ~ 1142년
Yue fei-brightened.jpg
악왕묘의 악비 상
태어난 곳 하북, 상주(相州) 탕음현(湯陰)
죽은 곳 임안부(臨安府)
별명 鵬舉(字), 忠武
복무 남송
최종 계급 군사통수(軍事統帥)
지휘 남송 해군
주요 참전 금나라와의 전쟁
기타 이력 1204년 악왕 추존

 

악비(중국어 정체: 岳飛, 간체: 岳飞, 병음: Yue Fei 웨페이[*], 1103년 3월 17일 [1] ~ 1142년 1월 27일)는

송나라 남송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 금나라여진족 군대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 초기의 장군이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충무로 개정되었으며,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악왕(鄂王)이 되었다.

명나라 이후 한(漢)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금나라와 전쟁

1122년 개봉을 방어하고 있던, 종척을 따라 의용군으로 참가 했다.

그의 뛰어난 무용은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전공을 세우고, 정강의 변으로 남송이 들어서자

우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 성(湖北省)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1126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대가 화북(華北) 지방을 침입하여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했고,

금나라가 화북을 점령하고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자 고종을 따라 남하하였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군단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 라는 뜻의

 '악가군'이라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혔다.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을 새기는 모친

 

악비의 최후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 악운의 나이는 23세 였다. 그리고 북방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화의(和議)를 체결하였고, 이 화의를 굴욕으로 본 인사들에 의해 당대에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다.

1155년 진회가 죽고 난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어 항주서호 부근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뒤에 충무의 시호가 가증되었다.

 

 

진회에게 붙어 악비를 죽게 한 장준(張俊)과 만사설(万俟卨)의 무릎꿇은 동상   위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