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일본인은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일본의 3대 영웅으로 손꼽히는 세 사람 중
우리에게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자(者)는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다.
다이코(太閤) 통로와 나카무라(中村)
"이 일대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향입니다. 저기를 보세요. 다이코(太閤)의 거리라는 표지판이
있지 않습니까? 나카무라(中村) 공원도 있습니다."
필자를 안내하던 나고야(名古屋)의 이토 순이치(伊藤俊一·61)씨(언론인)가 한 말이다.건물과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나카무라 거리. 이토(伊藤)씨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번화가
사카에(榮)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다음날 필자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 나고야(名古屋) 역으로 갔다. '나고야 역 후면에 가면 태합(太閤: 다이코)의 거리가 있으렷다?'
나고야 역의 태합 통로 |
태합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컫는다.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나고야 역 후면으로 들어가자 '태합의 통로'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문을 나서자 태합의 거리로 이어졌다. 나고야(名古屋) 역을 뒤로하고 나카무라 1죠메(一丁目)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나카무라 공원. 2죠메, 3죠메를 지나 4죠메 쯤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나카무라 공원이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약 2km쯤 될 것입니다. 걸어서는 무리입니다. 택시를 타셔야 할 것입니다."
순간 택시 한 대가 스르르 다가 왔다. 길을 가르쳐준 사람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내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운전사는 반가워하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공원에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이 '히데요시(秀吉)의 고향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며 고개를 갸웃 둥했다. 필자는 딱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미소로 대신했다.
나카무라 공원의 입구 |
나카무라 공원 앞에서 내리자 그 안에 뭔가가 있어보였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과 공원 내 건물에서 세월의 두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초등학교 학생들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는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에 빠져 우두커니 서서 어린학생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필자는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리다가 어느 순간 셔터를 멈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지'라는 비(碑)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생지 |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누구의 손에 들어갔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필자는 표지석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역사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미꾸라지를 잡던 원숭이 상(像)의 소년
관료 출신 작가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79)'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1551년 봄날. 오와리(尾張: 현 나고야)의 나카무라코(中村鄕)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15살짜리의 촌티 나는 소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컬음이다. 그 소년은 운명처럼 다가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성장했고, 훗날 일본을 통째로 손아귀에 거머쥐는 대업을 이룩했다. 그는 자신의 성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꿨다. 운명을 개척할 이름이라고 했던가.
'도키치로(藤吉郞)-'
'오와리(尾張) 나카무라 태생인 자가 도토미에서 길운(吉運)을 만난다.'
그는 마쓰시타 고헤에(松下 加兵衛, 1537-1598) 밑에서 창고지기를 했다. 때로는 도둑으로 몰리는 누명을 쓰면서 사회의 냉혹함을 몸소 터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흠모했던 것도 자신이 선택한 길운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님은 세상을 바꾸려고 그러시는 거야. 세상의 관행을 바꿔서 능력 있는 사람은 누구나 출세할 수 있도록 하는 거야."
"오다 노부나가 님은 신이야."
'사카이야 다이치'는 소설에서 이 부분을 '반함'으로 풀이했다. '사람이 누구에게 반한다'는 것은 '이해관계가 없이 무조건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싶어 하는 심리상태'라고.
이것은 제3자의 눈에서 보면 순전히 미친 짓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인 행위지만, '인간사회에서는 그런 부분으로 움직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도키치로.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이름을 바꿔서 태합(太閤)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이 작은 남자도 그런 광기에 휩싸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남자가 운이 좋았던 것은 '반한' 상대가 오다 노부나가, 개혁을 추진하고 이를 실현 시키는 데에 열중한 천재였다는 점이다.
무모한 조선 침공과 향도정명
그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 일본 통일의 끝 무렵에 규슈(九州)를 정벌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야욕을 내보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對馬島) 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무가내. 히데요시는 1590년 향도정명(嚮導征明)을 외친다.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내라."
기념관에 있는 히데요시의 대외정책 |
<1592년부터 히데요시(秀吉)는 명(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두 번에 걸쳐서 조선 출병을 명했다. 이 전쟁으로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국내에서도 큰 부담이 됐다. 전쟁은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끝이 났다. 조선 출병의 실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을 약체화시킨 최대의 원인이 됐다.>
나카무라 공원 내 작은 기념관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대외 정책'에 대한 설명문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무모한 전쟁을 획책하려는 자들이 많다. 그 누구에게도 득(得)이 없는 전쟁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히데요시(秀吉)는 무모한 야욕을 불태우다가 1598년 9월 18일 눈을 감았고, 그의 사후에 벌어진 일들은 더욱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계속 조닷
'知識있는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와이(荷渦理) 王政 복고 운동 中國이 앞장선다는데… (0) | 2015.02.12 |
---|---|
메이데이(Mayday)는 어떻게 조난신호가 됐나 (0) | 2015.02.06 |
영국을 ‘황금의 시기’로 이끈 외로운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1) (0) | 2015.02.03 |
"가미카제는 순교자라 믿었는데… 군국주의에 속았다" (0) | 2015.01.29 |
동백림 사건 (0) | 2015.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