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고암' 이응노 화백의 드로잉 700여점 최초 공개 - 빛바랜 30~50年代 서울… 스케치북 위에 스며들다

yellowday 2015. 1. 28. 10:19

입력 : 2015.01.28 03:00 | 수정 : 2015.01.28 10:09

[이응노 미공개 드로잉 700여점 최초 공개]

전쟁 폐허된 서울, 창경원 소싸움… 당시 생활상 세밀하게 스케치
고궁·인물·시장 등 소재 다양 "寫景的 드로잉, 역사적 가치 커"



"시정(市井)에서 오고 가는 길가에 눈에 뜨이는 주위의 모두가 서정시로 보여 그것이 즉시 그림이 되고 마는 것인데…. (중략) 일련의 인물화들은 마치 씨(氏)의 신변 소설을 보여주는 듯하다." 1955년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운보 김기창은 고암 이응노를 이렇게 평했다. 운보의 말대로 고암은 섬세한 눈과 빠른 손으로 일상의 단면을 닥치는 대로 스케치북에 담았다.

27일 처음 공개된 이응노 화백의 드로잉 700여점은 살아 있는 우리 근현대사다. 외국인 눈에 비친 당시 풍경 사진은 더러 있었지만, 드물게 우리 화가의 시선으로 본 우리 풍경이다. 시골 풍경, 풍속, 인물, 산수, 누드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윤범모 가천대 회화과 교수는 "방대한 드로잉을 보면 그가 철저한 현장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며 "박수근, 이중섭 등 근대 작가 중 일상을 이렇게 꼼꼼히 스케치해 남긴 작가는 없다"고 했다.

①해방 전후 시장통에서 가마솥을 걸고 국밥 파는 주모. ②일제강점기 전봇대를 세우는 모습, 종이에 수채. ③1948년 8월 창경원에서 열린 소싸움. ④1939년 6월 7일 경성 경운동 천도교 수운회관. ⑤1941년 3월 7일 경성 우신회관 기생이 낮잠 자는 모습. /가나문화재단 제공
'동양화의 추상적 표현'으로 압축되는 이응노의 화풍과는 달리 드로잉은 구체적이고 묘사적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화신백화점 쇼윈도에 세워져 있던 '진열 인형'(1938년), 창경원(현 창경궁)에서 벌어졌던 소싸움(1948년), 시장통에 가마솥을 걸고 국밥 파는 주모, 경성 기생의 모습(1941년) 등 당시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세밀한 스케치가 눈길을 끈다.

현재와 당시 풍경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1939년 그린 서울 경운동 천도교 수운회관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다. 1943년 고암이 생가를 그린 '자택 풍경'은 현재 그 자리에 복원한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 실제와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6·25전쟁 때 폐허가 된 서울 도심의 모습은 중요한 사료다. 당시 종군 화가들은 국군의 승전보를 알리는 데 주력했지 파괴된 도시 모습을 거의 담지 않았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의미를 담아 추상적으로 표현한 사의적(寫意的) 그림이 아니라 실제를 사실적으로 포착한 사경적(寫景的) 드로잉이라 후대에 주는 역사적인 가치가 더 크다"고 했다.

고암의 미공개 드로잉 700점은 3월 1일까지 서울 인사동길 가나인사아트센터 4·5층에서 전시된다. (02)736-1020



	고암 이응노

☞고암 이응노

추상 동양화를 개척한 선구자.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50대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활동하면서 동양 필묵에 현대적 감각을 결합한 '문자추상' '인간 군상'을 완성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국내 활동 및 입국이 금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