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言 四字成語

'파부침주'破釜沈舟

yellowday 2015. 1. 2. 18:30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히다. 살아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를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급격히 추진된 진(秦)나라의 통일 정책과 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진시황제(秦始皇帝) 말년에 극단적인 탄압 정책이 시작되었다. 진나라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났다.

일개 품팔이꾼이던 진승(陳勝, 진섭(陳涉))과 오광(吳廣)이 봉기해 장초(張楚)를 세우고 진나라에 항거하다가 실패한 후, 초나라의 귀족 출신인 항량(項粱)이 회계군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그곳을 기반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모사 범증(范增)의 계책에 따라, 일찍이(BC299) 진나라와 회맹을 하러 갔다가 진나라에 억류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하고 만 비운의 회왕(懷王, 재위 BC328∼BC299)의 손자인 웅심(熊心)을 찾아내어 회왕(懷王)으로 옹립하고 초나라를 재건했다.

당시 변방의 하급 관리인 정장(亭長)에 불과했던 유방(劉邦)은 여산릉(진시황의 능) 공사에 동원되는 인부들을 인솔하고 가던 중, 탈주자가 속출하자 아예 인부들을 해산시켜 버리고 자기 지역에서 소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패현의 서기 소하(蕭何)와 옥리(獄吏) 조참(曹參), 그리고 개백정 번쾌(樊噲) 등의 지지에 힘입어 패(沛,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를 접수하고 현령으로 추대되어 활약하다가 항량에게 가담했다.

항량은 장한(章邯)을 격파하고 군대를 이끌고 정도(定陶)에 이르러 다시 진나라 군사를 깨뜨렸다. 항우(項羽)와 유방은 진나라 군대와 옹구(雍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이유(李由, 이사(李斯)의 아들)의 목을 베었다. 항량이 더욱 진군을 가볍게 보고 교만한 기색을 보이자 송의(宋義)가 간했다. “전쟁에 이겨 장수가 교만해지고 병졸이 게을러지면 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항량은 듣지 않았다. 진나라 이세(二世)황제가 군대를 모두 일으켜 장한에게 보태 주자, 장한이 초군을 쳐 정도에서 크게 깨뜨리고 항량을 죽였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을 격파하고, 거록(巨鹿)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초의 회왕은 송의를 상장에, 항우를 차장에, 범증을 말장으로 임명하여 5만의 원병을 파견했다. 하지만 송의는 안양(安陽, 산동성(山東省) 조현(曹縣))까지 와서 무려 46일 동안을 움직이지 않고 전쟁 상황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조나라 군대가 이기면 그 기회를 타서 함께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만약 진나라 군대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힘이 약해져 있을 테니 그때 가서 진나라 군대를 쳐도 된다는 계산이었다. 항우의 생각은 달랐다.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공격하는 사이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안팎에서 협공을 하는 형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항우의 주장이었다.

「그런 사이 11월 중순이 되자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만 갔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 송의를 베고 군대를 모두 이끌고 황하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치 양식을 지니고서 사졸에게 죽음으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는데, 누구 하나 마음을 돌이키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진나라 군대와 아홉 번 만나 싸워 크게 쳐부수고 왕리(王離)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초나라 군대가 제후군의 으뜸이 되었고, 항우는 비로소 제후의 상장군이 되었으며, 제후가 모두 그의 소속이 되었다.(十一月, 項羽卽其帳中, 斬宋義, 乃悉引兵渡河, 皆沉船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 無一還心. 於是, 與秦軍遇九戰大破之, 虜王離. 當是時, 楚兵冠諸侯, 於是始爲諸侯上將軍, 諸侯皆屬焉.)」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데,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린 데서 유래하여 ‘파부침주’는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파부침선(破釜沉船)’, 혹은 식량을 버리고 배를 가라앉혔다는 뜻의 ‘기량침선(棄糧沉船)’이라고도 한다.

왕리는 일찍이 항량의 아버지 항연(項燕)을 죽인 진(秦)나라의 장군 왕전(王翦)의 손자이니, 항우로서는 간접적이나마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셈이 된다.

 

*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파부침선’의 기개로 일을 한다면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