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 여는 미디어 작가 이이남
움직이는 名畵, 제2의 백남준으로… "날 만들어준 TV, 이젠 갑갑해져"
전남 담양 단칸살이 일곱 식구에게 성탄절 산타는 흑백 자바라 TV였다. 뜨끈한 구들장에 엉덩이 지지면 아버지는 항아리에 묻어둔 생무를 깎아 주셨다. 훗날 임종을 앞둔 아버지께 둘째 아들 이남(二男)이 물었다. "성탄 때 TV 보던 기억 나세요? 그때 아버지가 주신 생무 참 맛있었는데…."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부자지간 마지막 순간이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45)에게 TV는 차가운 바보상자가 아니다. 가족이 담긴 따뜻한 추억 발전소다. 그래서 이이남의 영상 작품은 자극적인 법이 없다. 기술을 적용했지만 잔잔하고 서정적이다. 2006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수련 가득한 모네의 연못에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영상,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영상으로 단번에 주목받았다. '제2의 백남준'이란 극찬까지 나왔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에서 예수를 분리해 공중에 띄운 작품 ‘다시 태어나는 빛’ 앞에 누운 작가 이이남. 그는 “작품 앞에 관객이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유명한 작품을 활용한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때마침 첨단 디지털TV 마케팅에 열 올리던 삼성전자의 눈에 들었다. 삼성은 모니터를 지원했고 이이남은 그 TV에 한국의 전통을 소재로 한 영상을 담아 뉴욕 아모리쇼, 런던 사치 갤러리 등에서 전시했다. 한국 기업과 작가의 협업이 성공한 사례다. 내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특별전 작가로도 초대됐다.
지난 1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시작된 이이남 개인전은 TV에서 조금 비켜가려는 작가의 고민을 역력히 보여준다. 평면의 TV 모니터로만 연출됐던 그의 세계가 입체로도 펼쳐졌다. 강세황의 산수도에 크리스마스트리 영상을 입힌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모니터 4대를 세로로 길게 연결해 만든 '베르메르의 하루' 등 영상 작업 20점에 새로운 스타일의 조각 작품 8점이 더해졌다. 영상 작품은 이이남표 영상을 익히 아는 관객에겐 새롭지 않겠지만, 처음 보는 이라면 흥미롭게 다가갈 것이다.
- 베르메르 그림 ‘우유 따르는 여인’을 차용해 만든 영상 작품 ‘베르메르의 하루’. 모니터를 세로로 길게 연결해 우유가 물줄기처럼 흘러내린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작가는 신작 조각 작업에 무게 중심을 뒀다. "3년 만의 전시다. 건축가 빌모트가 계단과 복도를 입체적으로 설계한 전시장을 수차례 와서 봤다. 평면 영상 작업만으로는 빈약해 보일 것 같아 조각을 넣었다"는 게 작가의 설명. 하지만 이것만으로 새 도전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이이남은 원래 조각을 전공했다. 조선대 조소과를 나와 1997년 순천대 만화학과에 미술해부학 강의를 갔다가 학생들이 컴퓨터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광경을 보곤 영상을 미술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영상 작업을 한 지 어느덧 17년. 조각에 갇혀 지내는 게 싫어 TV로 도망쳤던 사내는 이제 TV에 갇히기 싫어 다시 조각을 찾았다. "영상 작업은 화면을 조각하는 것"이기에 오랜만에 조각도 잡았지만 감이 금방 되살아났다. 되레 "손이 쉬는 동안 생각이 자랐다"고 했다.
전시 제목이자 타이틀 작품인 '다시 태어나는 빛'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차용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하늘로 승천했다. 작가는 "예수와 성모를 떼어냄으로써 새로운 부활을 표현했다. 인간이 편리하고자 만들어놓은 기술이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기술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재탄생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전시장 초입에 세워진 작품 '빛의 언어'에 시선이 갔다. 밀로의 비너스상 등판을 스크린 삼아 사자성어가 영상으로 비친다. 자승자박(自繩自縛). 인간이 만들어낸 빛, 즉 기술이 스스로를 옥죈다는 것이다. 어쩌면 TV 안에 갇히기 싫어 새 실험을 감행했으나 명작 차용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한 작가가 자신에게 울리는 경종일지도 모르겠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