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26세 나폴레옹이 32세 애 딸린 과부와 결혼한 이유 - 그리고 나폴레옹의 성기는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yellowday 2014. 6. 16. 16:00

 

▲ 나폴레옹과 조셉휜
<6월18일은 워털루 혈전 199주년 기념일>
 
최근 우연히 도서관에서 "Napoleon & Love"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DVD를 발견하고 빌려다 보았다. 모두 9편으로 짜여진 
이 영화는 40년 전 영국에서 만든 TV 미니씨리즈를 DVD 3장으로 근년에 새로 내놓은 것이었다.
 
19세기 초 15년간 프랑스와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과 그의 부인 조셉휜의 러브 스토리는 유명하다. 
사람들은 조셉휜이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미니씨리즈에 나오는 조셉휜은 
미인이 아니어서 나는 속으로 저런 여자를 조셉휜 역으로 쓰다니 하고 적잖게 실망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Was Josephine Bonaparte really a beauty?"(조셉휜은 정말 미인이었나?)라고 찍어넣고 google 
검색을 해보았더니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조셉휜은 결코 미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키도 특별히 크지 않았고, 피부가 
백옥같이 흰것도 아니고 약간 누르스럼했다. 치열도 가지런하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녀의 유일한 매력은 애교 넘치는 목소리와 걷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26세 프랑스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결혼했을 때 그녀는 남매가 딸린 32세 과부였다. 당시 인간의 평균 수명은 50세도 채 안되었을 때라 여자 32세면 할머니인 
셈이다. 그 당시 여자들은 20세 전에 모두 서둘러 시집가던 때였다. 
잘 나가던 청년 장군이 6년 연상의 과부, 그것도 14세 아들과 12세 딸을 둔 과부와 결혼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역시 돈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 혁명군의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키도 작고 얼굴도 결코 미남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이탈리아 영토였다가 프랑스에 합병된 코르시카 섬 출신 가난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심에 가득찬 정치군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바람이 자기들 나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등 유럽 강국들이 프랑스를 왕정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혁명군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나폴레옹은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정치적 야심이 컸던 그에겐 돈이 필요했다. 그런 때에 조셉휜을 만났다. 그녀는 돈 많은 프랑스 귀족 알렉상드로 보우아네이의 
부인이었다. 그녀가 보우아네이와 결혼하게된 것도 드라마 같았다. 원래는 그녀의 동생이 먼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동생이 
갑자기 병으로 죽자 대신 시집을 갔다. 그 때 그녀의 나이 16세. 곧 아이 둘을 낳았지만 신랑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한다.
 
그나마 남편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절 반혁명세력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녀 자신도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로베스피엘이 먼저 처형되는 바람에 그녀는 목숨을 건졌고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 또 변을 당하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정치적 힘이 있는 사람들의 정부 노릇을 하다가 나폴레옹을 만났다.
 
그녀는 잘 나가는 청년 장군 나폴레옹이 자기와 두 자녀를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정부 노릇 1년만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 당시 기록들을 보면 나폴레옹은 “키도 작고 비쩍 마르고 군복도 지저분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장발이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한다.
 
돈이 필요했던 나폴레옹과 자기 가족을 지켜줄 “빽”이 필요했던 조셉휜의 정략결혼은 1976년 3월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미 남성편력 경력이 화려했던 조셉휜은 남편이 멀리 전쟁터에 나가있는 동안 바람을 폈다. 아주 젊은 미남 육군 
장교와 밀애를 했고 이 소문은 나폴레옹 귀에도 들어갔다. 화가 난 나폴레옹도 외지에서 다른 여자들과 맞바람을 피었다 
한다. 그녀는 또 사치가 심해서 전 남편 유산을 사치품 사는데 탕진해서 나중엔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다.
 
프랑스 혁명정부를 위협하는 외국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시킨 나폴레옹의 힘은 점점 커졌다. 그는 혁명세력이 자체 분열하여 
싸우는 틈을 이용해 1799년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된다. 5년 뒤 1804년엔 공화제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귀시켜 
스스로 황제가 된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황제나 왕들은 반드시 교황이 참석하는 대관식에서 교황이 직접 씌워주는 왕관을 
쓰게되어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이 들고 있던 왕관을 빼앗듯이 받아 자기가 직접 머리에 썼다. 
그리고 조셉휜에게도 자기가 직접 여왕관을 씌워주는 파격 행동을 취했다.
 
이렇게 조셉휜은 프랑스 제국 왕비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 제국을 넘겨줄 왕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위성국이 된 폴란드 70대 늙은 귀족의 20대 부인 마리 발레브스키에 반해 그녀를 이혼시키고 애인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곧 임신한다.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낀 조셉휜은 나폴레옹이 불임남성이므로 폴랜드 애인이 낳은 아들은 나폴레옹 자식이 아니라고 소문을 
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아이에게 자기 성을 붙여주지 않고 엄마 성을 따르게 
했다. 폴란드 애인은 나중에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다가 28세에 출산 사고로 사망한다.
 
자신의 초라한 족보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의 여동생(15세)과 정략결혼을 시도했으나 
나폴레옹이 불임이라는 소문을 들은 러시아황제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인접국이며 당시 유럽 대륙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딸 마리아 루이제(18세)와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유럽 왕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위상도 높이고 아들도 얻는 일거양득을 노렸다.
질투심에 불탄 조셉휜에게 나폴레옹은 이혼을 요구한다. 그녀는 기절을 하며 쓰러지기까지 했지만 자신이 후사를 낳아주지 못한 
죄를 인정하고 이혼서에 서명한다. 1810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18세 딸과 재혼한 나폴레옹은 젊은 왕비가 아들 낳기를 학수고대
한다. 다행히 곧 세자가 태어난다. 나폴레옹이 불임남성이 아님이 이번엔 확실히 증명된 것이다.
 
한편 프랑스가 유럽을 전부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전쟁을 계속한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려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킨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나폴레옹은 
청혼 거절 당한 것에 대한 보복도 할 겸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1812년 무리하게 모스크바를 향해 수십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진격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동장군(강추위)에 발목이 잡혀 모스크바 문전에서 퇴각하여 프랑스로 돌아오고 만다. 
이게 치명타가 되어 나폴레옹 15년 천하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1814년 지금의 독일 땅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은 
연합군에 패해 프랑스 남쪽 해안의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가 재기를 시도했으나 
100일 천하로 끝나고 지금의 벨기에 땅 워털루에서의 대결전에서 영국과 프러시아 연합군에 패한다(1815년 6월).
 
그는 영국 배에 실려 멀리 남 대서양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끌려가 6년간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1821년 52세 때 숨을 거둔다.
(영국이 서서히 독살했다는 설도 있음). 그의 유해는 1840년 12월 빠리로 이장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의 시신을 부검했던 영국 의사가 그의 성기를 잘라 가지고 
귀국했다고 한다. 의사는 그것을 나폴레옹 고향 코르시카 섬의 한 신부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게 또 어떻게 192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우욕에서 전시되었다.
당시 TIME잡지는 "그게 가죽 구두끈 토막 같았다"고 썼다. 50년 후인 1977년 뉴우욕 근처의 한 비뇨기과 의사가 그것을 당시 
돈 3천불에 샀다고 하는데, 그 의사가 죽은 뒤엔 딸이 물려받아 보관했다. 2011년 TIME지 보도에 의하면 나폴레옹의 "그것"은 
2011년 현재 10만불을 호가했다고 한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전하면,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와 왕비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이비 종교인이자 호색한이었던 라스푸틴의 "그것"도 그가 암살된 후 잘려 영국인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조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