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 - 히로시마 원폭에 피폭되어...

yellowday 2014. 3. 28. 08:27

 

이우
李鍝
Prince Yi Wu 01.jpg
재위 1917년 ~ 1945년
전임자 이준용
후임자 이청
별명 성길 (초명)
시호 흥영군 (사시)
배우자 박찬주
자녀 이청, 이종
부친 의친왕 이강 (생부)
영선군 이준용 (양부)
모친 수인당 김흥인 (생모)
출생 1912년 11월 15일(1912-11-15)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망 1945년 8월 7일 (32세)
일본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사인 원자 폭탄에 피폭
매장지 운현궁 가족 묘지
거주지 운현궁, 도쿄 별저

Unhyeongung Ihwamun.png
운현궁 오얏꽃 문장
이우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
태어난 곳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사동궁
죽은 곳 일본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복무 일본 제국 육군 군기 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중좌 계급장 육군 중좌
대좌 계급장 육군 대좌 (추서)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일본 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
일본 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일본 제국 공3급 금치훈장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자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길(成吉)이며, 아호는 염석(念石), 상운(尙雲)이다.[1]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동궁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에 히로시마 시 니노시마에서 사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2] 

 

결혼

이우와 박찬주 (1935년)

 

일본인과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친왕과 박영효(朴泳孝)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朴日緖)의 딸 박찬주(朴贊珠)와 1935년에 결혼하였다.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의 자녀와 결혼시켜 혼인 관계를 형성하려 하였다.[2]

이와 같은 목적으로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르면 왕공족의 혼인은 일본 천황의 칙허를 통해서만 인정되었다.[25]

 

영친왕, 덕혜옹주, 이건의 혼인과 같이 일본인과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어 궁내성에서는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쯔구(柳沢保承)의

딸을 이우의 배우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야나기사와는 이우의 이복형 이건의 장인 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松平胖)와

동서가 되었으며, 이우의 숙부 영친왕의 장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王)와도 동서 사이였다.

 모두 옛 사가 번의 다이묘였던 후작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의 사위들로 궁내성의 계획대로 된다면 왕공족 남자 전부는

나베시마의 외손주 사위가 되는 셈이었다.[54]

 

의친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우도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19] 일본인 신부를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의친왕과 긴밀한 관계였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가 이우의 배우자로 물망에 오르고 혼약이 이루어졌다.[55]

이우의 양모 광산 김씨는 박영효가 내무대신으로 재임하던 1895년에 법무협판 김학우(金鶴羽) 암살과 모반 혐의로

양부 이준용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박찬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19]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에

당시 이왕직 장관 한창수(韓昌洙)에게는 혼약이 성립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56]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은

박찬주와의 혼약이 천황의 칙허없이 진행되었다고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우의 조선인과 결혼하겠다는 저항과 박영효의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로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이우와 박찬주의 혼약을 인정하게 된다. 박영효는 일단 혼약이 철회된 것처럼 해놓고, 직접 도쿄에 가서 귀족원 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책과 인맥을 활용하여 추밀원, 귀족원, 궁내성에 공작을 벌였다. 결국,

1934년 7월 11일에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59] 1935년 4월 17일에는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 1935년 5월 3일에 이우와 박찬주는 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61]

같은 해 6월 28일에 경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한편,

1936년 4월 23일에 장남 이청(李淸)이 도쿄 별저에서 태어났고, 1940년 11월 9일에는 차남 이종(李淙)이 도쿄 별저에서 태어났다.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