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삼일천하 (三日天下)

yellowday 2014. 5. 19. 16:49

삼일천하(三日天下)

 

10월 17일 저녁 김옥균 등은 창덕궁 금호문 앞에 당도하여 김봉균(金奉均), 신복모(愼福謀) 등이 거느리고 온 40여명의 병사들을

문 밖에서 지키게 하고는 미리 내통하고 있던 수문군이 문을 열어주어 바로 입궐했다.

 

또한 윤경완(尹景完)이 인솔하는 무장병력 50여명에게는 전문 앞을 지키게 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고종이 있는

침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고종에게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난 것과 그 원인이 민씨 척신 세력의 음모와 부패, 민생의

피폐때문임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함으로 경우궁으로 피난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다지던 고종 내외도 침전 동북쪽 통명전 부근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오자 놀라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고종 일행이 경우궁에 도착하자 박영효는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 병사 200명을 경우궁 주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 13명은 국왕의 거처 바로 앞을 지키면서 출입자를 통제하도록 조치한 후에, 왕명으로

중신들을 불러들여서 일단의 민씨 척신 세력을 척살해 버렸다.

날 밤 군사들은 척신계와 수구파 인사들은 윤태준(尹泰駿), 이조연(李祖淵), 한규직(韓圭稷), 척신인 민영목, 조영하,

순명효황후의 친정아버지 좌찬성 민태호 등과 거사에 동조하기로 했다가 변절한 내시 유재현 등을 살해하였다.

 

10월 18일 척신 정권 지도자들을 처형한 개화파는, 18일 새벽 신정부의 발족을 알리고 인사를 단행하였다.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에, 홍영식(洪英植)은 좌의정에, 윤웅렬형조판서, 박영효전후영사, 서광범

좌우영사, 서재필병조참판, 신기선(申箕善)은 이조참판, 승정원도승지박영교로 내정하여 내각을 장악하였다.

김옥균은 재무와 내무를 관장하는 호조의 차관인 호조참판을 맡아 개혁에 필요한 재정의 조달을 담당하기로 했다.

내각 구성을 마친 새 정부는 14조항의 강령을 발표한다.

  • 첫째, 청에 잡혀 간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 둘째, 문벌을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
  • 셋째,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가난한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 재정을 늘린다.
  • 넷째,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서 우수한 자는 관직에 등용한다.
  • 다섯째, 탐관오리 중에서 그 죄가 극심한 자는 처벌한다.
  • 여섯째,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던 정부 소유의 환자미는 모두 탕감하고 받지 않는다.
  • 일곱째, 규장각을 폐지한다.
  • 여덟째, 빠른 시일 내에 순검(巡檢)을 두어 치안에 주력한다.
  • 아홉째,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한다.
  • 열번째, 유배되거나 구속되어 있는 자는 형을 감해 준다.
  • 열한번째, 4개영을 1개영으로 통폐합하되, 그 중에서 장정을 봅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 열두 번째, 일반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하고 기타 모든 재정 담당 관청은 폐지한다.
  • 열세 번째,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안에 있는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 열네 번째, 육조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애되, 대신과 참찬이 이를 결정하게 한다.

그밖에 개화파 혁명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개혁안을 발표했다.

           *  첫 번째, 전 국민은 단발한다.

  • 두 번째, 외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 세 번째, 궁내성을 별도로 설치하여 왕실 업무와 일반 국무를 구분한다.
  • 네 번째, 국왕을 '성상(聖上) 폐하(陛下)'로 칭해서 타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예우하며 대조선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유지한다.
  • 다섯 번째, 지금까지의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에 여섯개의 부서를 둔다.
  • 여섯번째, 과거제도를 폐지한다.
  • 일곱번째, 내외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한다.

그러나 지지기반이 취약한 내각은 척신 정권이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반격을 가하자마자 그대로 몰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