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23 03:14
할아버지는 1738년 프랑스가 식민 통치를 하던 카리브해 아이티에 갔다가 아름다운 흑인 노예 마리-세제트 뒤마를 만났다.
그는 큰돈을 내고 뒤마를 사서 살림을 차렸다. 그녀는 1남 3녀를 낳고 1772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떴다.
▶라파예트는 4남매 중에 아들만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피부 빛이 검은 아들은 아버지 성이 아닌 엄마 성 뒤마를 써야 했다. 그는 직업군인이 된 뒤 백인 여자와 결혼해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를 얻었다. 뒤마는 이름난 작가가 된 뒤에도 업신여김을 당하곤 했다. 누군가 "뒤마의 혈관엔 검은 피가 흐른다"고 했다. 뒤마가 차분하게 되받아쳤다. "우리 아버지는 혼혈이고, 할머니는 검둥이였고, 증조할아버지는 원숭이였다. 그런데 당신 집안은 우리 집안이 내려왔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고 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카리브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설탕을 대량으로 만드는 사업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노예들은 폭염 속에서 매질을 당하며 일했다.
유럽인은 노예의 피땀과 눈물이 어린 설탕을 달콤하게 누리며 살았다.
▶영국 배가 싣고 가던 노예 130여명을 산 채로 바다에 던진 일도 있었다. 먹을 물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영국 법원은 "말을 바다에 빠뜨린 것과 같다"며
선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카리브해 14개국이 과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노예무역을 사과·배상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노예제뿐 아니라 식민 통치가 끼친 해악에 대해서도 배상을 받겠다고 했다. 유럽 국가들은 "그때 노예무역은 불법이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자 카리브해 국가들은 법무법인을 통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199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데렉 월코트는 카리브해 세인트루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은 포도 같은 자줏빛 에게해가 아니다.
흐르는 것은 노예들의 말뿐"이라고 읊었다. 그렇듯 노예의 후손들은 지금도 가난하고 힘겹게 산다. 노예제는 사라졌어도 카리브해 사람들은
슬픈 기억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과거사 배상 요구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몸부림이다. 그런 심정을 잘 아는 우리의 코끝을 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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