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양계(兩系) 사회

yellowday 2013. 10. 19. 06:03

 

입력 : 2013.10.19 03:04

고려 문인 이규보는 장인이 세상을 뜨자 제문(祭文)을 지었다. "사위가 되어 밥 한 끼와 물 한 모금을 모두 장인에게 의지했다"며 슬퍼했다. 고려의 혼인 풍습은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었다. 대부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다. 아이들은 친가와 외가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모와 고모를 똑같이 '아자미'라고 불렀다. 부모는 아들딸 구별 않고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다.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부모 제사를 모시는 '윤행(輪行)'을 했다.

▶정도전은 조선을 유교 국가로 만들면서 고려 풍습을 개혁 대상으로 삼았다.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는데 부인이 무지해 자기 부모의 사랑을 믿고 남편을 경멸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교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 마침내는 남편과 반목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도 남자가 처가에 장가를 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은 16세기까지 성행했다.


	[만물상] 양계(兩系) 사회
▶충무공 이순신도 10년 처가살이 끝에 무과에 급제했다. 아들 없이 죽은 부모 제사는 외손자가 맡는 게 당연했다. 율곡 이이도 딸만 다섯 둔 외할아버지·할머니 제사를 모셨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유교 예법에 바탕을 둔 부계(父系) 사회로 변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을 떠받든 사림(士林)이 정치권력을 쥐고 일상생활도 지배했다.

▶결혼 제도도 주자(朱子)가 가르친 대로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는 친영(親迎)'으로 바뀌었다. 유산도 장자(長子)가 독차지했다. 역사학계는 '양반층이 가문을 이을 큰아들에게 재산을 몰아줘 평민을 지배하는 특권층으로 키웠다'고 풀이한다. 딸이 차별당하고 아내와 처가 위상도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는 "앞으로 부계 중심 사회는 존속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얼마 전 국내에 '한국의 유교화 과정'을 펴낸 한국학자다. 그녀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중시한 고려 이전 시대의 양계(兩系) 사회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처가살이하는 남자가 1990년 1만8000여 명이었다가 3년 전 통계청 조사에선 5만3000여 명으로 늘었다. 경제력이 떨어진 남자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다.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처가에 맡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은 고모보다 이모를 더 가깝게 여긴다. 신(新)모계사회라고들 한다. 그렇다고 부권(父權)이 스러진 건 아니다. 여권이 더 커졌을 뿐이다. 재산을 공동 명의로 해놓는 부부도 적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양계 사회'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결국 '모계 사회'로 가는 과정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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