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16 03:10
경북 왜관의 성베네딕도 수도원에는 '금강산 내산전도' 등 그림 21점이 담긴 겸재 정선의 화첩이 있다. 이 화첩은 1925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 원장 노르베르트 베버가 금강산 여행 도중 보고 반해 구입했던 것이다. 독일 수도원에 있던 화첩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성베네딕도회 임인덕(林仁德·본명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신부의 노력 덕분이었다. 2005년 오틸리엔 수도원 측은 "왜관의 우리 형제 수도원에 큰 신뢰를 나타내는 뜻으로 돌려준다"고 밝혔다.
▶1965년 독일서 사제 서품을 받고 아프리카로 가려던 세바스티안 신부는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1966년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북 성주 본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는 신도들과 야외에 나가 기타를 치며 김상희의 '대머리총각'을 함께 부를 만큼 '튀는 신부'였다. 그는 성주 본당과 점촌 본당에서 10개월간 사목 활동을 한 것을 제외하곤 평생 출판과 영화에 매달려 '미디어 신부'란 별명을 얻었다.
▶1972년 성베네딕도회 산하 분도출판사 사장을 맡은 그는 산업화 바람이 거세던 한국사회에서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을 잇달아 펴냈다. 그중 1974년 발간한 '해방신학'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신학이 가르칠 수 없는 메시지를 영화로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안동 가톨릭센터에서 '영화포럼'을 열고 예술영화를 적극 소개했다. 이 모임에는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개신교·불교 신자까지 참여했다. 그는 막걸리와 김치를 놓고 영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등이 그의 노력으로 비디오로 출시됐다.
▶31세에 이 땅에 와 45년간 한국을 위해 노력한 세바스티안 신부가 그제 독일 프랑켄의 한 수도원에서 선종(善終)했다. 질병 치료차 독일에 머물던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보좌수사들이 전했다.
▶세바스티안 신부 외에도 한국에서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외국 신부와 수녀들이 많다. 유신시대부터 한국인의 인권 신장에 헌신하다 2009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헤르베르트 보타와(한국명 허창수) 신부, 전남 소록도에서 43년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도 잊을 수 없다. '내 것' 챙기기에 바쁜 이 시대 한국인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친 이분들에게 우리는 뭘 해 드렸던가. 조닷
'朝日報 萬物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계(兩系) 사회 (0) | 2013.10.19 |
---|---|
이순신 '구국의 길' (0) | 2013.10.18 |
日帝가 지은 꽃 이름 (0) | 2013.10.15 |
新장례 풍속 (0) | 2013.10.14 |
단편소설과 노벨상 (0) | 2013.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