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에 자신의 시를 감고 바다에 몸을 던진
탁월한 여류시인이자 비운의 여인
이옥봉 李玉峰 숙원이씨(淑媛李氏
조선 인조 때의 일로써,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명나라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명의 대신이 (조희일)에게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자신의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어 보여주자 (조희일)은 깜짝 놀라게 된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의 신분으로써
그녀의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사연은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있어서.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파도에 밀려 떠도는 것을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의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밖의 종이는 백지이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었으며 그 종이에는 신분을 알려주는 내용이 나온다.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원로대신은
시신에서 종이를 잘 거둬 시를 필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연을 안고서 조원의 아들
(조희일) 이 (옥봉)의 작품을 조선으로 가져와서
다시 책의 부록으로 후세에 전하게 되는데 ......
길가다가 한국 대나무를 발견하면 나만 반가을까 ?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옥봉 숙원이씨(淑媛李氏)는
그녀는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선조 때
옥천 군수를 지낸 왕족의 (이봉지)의 서녀(庶女)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 밖에 못함을 알게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가게 되었으며...
(옥봉)의 시적인 재치와 시귀에 대하여서는
장안의 명사들에게서 소문이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다.
그녀는 16세기 후반 조선 중기 선조임금 때에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같은 시기에는 허난설헌의
유명한 여류시인이 있던 시기였다.
(옥봉)은 명분이 있는 의로운 일에는 적극적인 면을 보인다.
그것은 당시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하게된다
(이옥봉) 이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여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온다면
세상 바뀐 모습을 이 여인처럼 물끄러미 보고 있었을까?
우리는 뭔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옥봉)은 승지를 지낸 조원(趙瑗)이란
선비를 만나면서 그를 지극히 마음을 두어
조원의 첩이라도 되겠다고 자청하여 그의 소실(小室)이 된다.
서녀의 신분을 한탄하여 어느 누구이든
첩살이의 신분이 싫어서 결혼을 거부하여
서울로 갔던 그녀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절대로 시를 짓지 말라고 맹세를 요구하게 된다.
그 당시 조선시대의 상황에서는 사회적 배경이나 신분제도
때문에 정실의 여자는 시와 음악등 예능에 관하여서도
얘기를 할 수 없는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실의 몸에서 태어 난 그녀는
시, 문학에 재주가 있어 배울 수 있었던게다.
어쩌꺼나, 여염집의 여인이 시를 짓고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남편된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옥봉)은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맹세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 보내었는데
그 시는 <위인송원 爲人訟寃〉이라는 시로써
이웃에 소도둑으로 몰린 사람을 대신하여 지어준 시이다.
내용은 “세숫대로 거울삼고 물발라 기름 삼아 머리 빗을지라도
내가 직녀가 아닌데 그대가 어찌 견우가 되리.”라고 하여
시를 통한 산지기의 억울함을 통해 그녀의 재치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일로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지만
(옥봉)은 지아비된 (조원)에게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 며
(조원)이 (옥봉)을 내친 것이다.
그 이후, 그녀는 가까이 한강 뚝섬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지내며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던게다.
더글라스는 만년필을 십여년 전에 구입한 이후로
자신은 정작 만년필을 좋아하지 않아서 보관만 하고 있었는데
내가 <파커 만년필> 에 대하여 애찬론을 펼치자 "당신이 주인이다" 라며
한 달후에 주겠다며 기다렸는데 한달 후에 포장을 하여 <선물> 이라며
내게 주었다. 몇 달 전에 나는 파커 만년필의 소고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귀한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셨다.
더글라스는 파커 만년필에 설명하기를 이 만년필은 한 때에는
프랑스에서 제작을 했다가 다시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꿈속의 넋(夢魂)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다음의 시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平生離恨成身病)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
(衾裏泣如氷下水)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 밤낮을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
그러다가 이생에서의 (조원)과의 희망이 희미해지자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서
가슴에 둔 자신의 시심을 마음껏 펴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자신의 시로 온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게 된다.
여성을 가정 내의 존재로만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거나 사회적 보호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을
시로 남길 수 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그녀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도 없을뿐더러,
정확한 자료는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단지 이름은 (숙원)이고 (옥봉)은 그이의 호이다.
여인네들의 마음 속 아픔조차 글로써 표현 할 수 없었던 시대.
그 불타던 시심은 결국 사랑에 버림받게 되게 만들었고,
결국은 외로운 죽음을 맞게 하였다.
그녀의 삶의 역사를 재 조명해 보는 이 때에
이는 참으로 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시신은 머나먼 이국땅에 묻혀졌지만
그녀의 주옥같은 시는 우리 곁에 돌아와 마음을 적신다.
<옥봉 이숙원에 대한 여러 내용들을 종합, 발췌하여 재 정리하였음.> ...차동휘 목사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