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徐廷柱, 일본식 이름: 達城靜雄,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는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한국의 이른바 생명파 시인이다. 호는 미당(未堂)이다.
생애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전시체제때 창씨개명을 하고 남의 집의 종이 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6년 동국대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에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당시,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위를 하였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여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는 고백을 한 바 있다.[1]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2]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파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파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줄곧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군부 독재와 유신독재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명성과는 별도로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고택이 남아 있으나 폐가로 방치되어 있다.[3]
[편집] 친일행적
서정주는 일제 말기,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일제와 항쟁하며 고난찬 가시밭길 속에서 산화했던 여러 의사들과 열사, 지사들과는 달리,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을 파는 친일.매국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큰 영광이라고 참전을 강권하고, 일본군의 종군 기사를 쓰는 일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인물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 처벌보다 그들을 비호하고 자신의 정치기반 확대에 이용코자 민족반역자들의 대부노릇을 한 이승만에 의하여 일제잔당 세력들은 민족반역행위에 대한 처벌대신 면죄부를 받음과 동시에 일제강점시 쌓아올린 지위와 재력을 이용, 더 높은 직책과 더 큰 명예와 더 많은 부를 얻게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며 미당 서정주 또한 그러한 부류중 하나로 반공을 국시로 했던 이승만정권과 유착, 남한문학계에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를 기반으로 문하에 수많은 후배와 제자를 거느린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는 주장이 그의 문학적 성과 이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문제로 당시를 살아왔던 모든 지식인의 친일부역 또는 협조가 시대상황의 불가피성이란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의건 타의건 앞장섰건 이용당했건 그 강도와 형태에 관계없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 죄과가 명확히 밝혀지고 본인들의 사죄와 가시적인 반성의 결과물로서 구체적 행동이 선행되야 한다는 당위적 도덕적 주장과 시대상황이 부여한 선택의 한계와 생존이란 문제에 직면한 현실속 인간에게 있어 적용되는 보편적 불가피성이 참작되어야만 한다는 옹호론이 오늘날에도 모든 분야 모든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에 있어 첨예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대상자의 친일행적이 진정 강요에 의한 절대불명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진 친일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였나하는 평가에 대한 시각차가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미당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서 자신의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민족앞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바 있다. 아래는 그의 말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그의 '친일문학'작품중 일부 내용이다.
[편집] 친군부,정부 행적
[편집] 이승만과의 관계
[편집] 전두환과의 관계
1980년대 초 서정주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때 전두환 지지연설을 했다.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전두환 예찬시'를 썼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편집] 동료 문인과의 관계
[편집] 미당의 시 경향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중 한명으로 탐미적인 경향이 보인다. 심지어 진보 문학가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은이 대표적이다. 미당 시의 특징은 바로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이다. 그의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미당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4]
[편집] 시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
- 《화사집》, (1941)
- 《귀촉도》, (1946)
- 《시선》, (1955)
- 《신라초》, (1960)
- 《동천》, (1968)
- 《질마재 신화》, (1975)
-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 번역 시집 《만해한용운한시선역》, (예지각, 1983) : 한용운의 한시를 가려 뽑아 번역한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