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제일모직

yellowday 2013. 9. 25. 07:08

 

입력 : 2013.09.25 03:04

1947년 3월 영국 상선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들어왔다. 페어리드호가 마카오에서 싣고 온 물자 중에는 영국제 양복 옷감 같은 고급 사치품도 있었다. 양복 한 벌 감의 값이 웬만한 월급쟁이 석 달 봉급보다 비쌌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의 재력가나 멋쟁이들은 너나없이 마카오에서 들여온 옷감으로 양복을 지어 입었다. 그래서 생겨난 유행어 '마카오 신사'는 첨단 패션과 부(富)의 상징이었다.

▶당시 서민들은 주로 미군 군복을 염색해 양복 대신 입고 다녔다. 일제강점기 때 들여온 구식 방적기로 짠 국산 양복지도 있었지만 옷감이라 하기 어렵게 조잡했다. 일반 서민도 번듯한 양복을 해 입게 된 것은 1956년 제일모직이 '골덴텍스'를 생산하면서부터다. 골덴텍스는 마카오 양복지값 5분의 1밖에 안 되면서도 품질은 뒤지지 않아 혼수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만물상 일러스트

▶제일모직은 삼성물산·제일제당과 함께 삼성그룹의 3대 모태(母胎) 기업으로 꼽힌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별표 국수'를 만들어 돈을 끌어모으다시피 했다. 삼성상회 앞에선 국수를 먼저 사 가려고 자전거와 소달구지를 끌고 온 상인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이 회장은 광복 후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6·25 전란 중엔 비료와 설탕을 수입해 호황을 누렸다.

▶이 회장은 전시(戰時)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단순 무역업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1953~54년 잇따라 설립한 회사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다. 두 회사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삼성그룹은 재계 선두 자리에 올라섰다. 한국 경제도 수입 대체 산업화를 통한 공업화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일생 세우거나 인수한 37개 기업 중에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제일제당은 오래전 삼성그룹에서 분리돼 CJ그룹으로 독립했다. 설탕·밀가루 회사에서 최대 종합 식품 회사로 올라섰고 영화·방송을 아우르는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됐다. 삼성물산은 해외 자원 개발과 건설 쪽으로 사업 분야가 많이 바뀌었다. 이번엔 제일모직이 직물·패션 사업을 계열사 삼성에버랜드에 넘기기로 했다. 매출 비중이 70%에 이르는 소재·부품 사업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창업 59년 만에 '본업'에서 손을 떼면서 회사 이름도 바꿀 것 같다. 제일모직으로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변신이지만 삼성가(家)의 뿌리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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