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 |
중국 당나라의 화가 오도자가 그린 초상 | |
공구(孔丘) | |
기원전 551년 중국 노나라 곡부 | |
기원전 479년 중국 노나라 곡부 | |
춘추 시대 | |
동양 철학 | |
유교의 창시자 | |
윤리학, 사회철학 | |
유교 |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로 떠받들어지는 중국의 사상가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공자의 자(子)는 경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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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 곡부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상은 전왕조인 은의 자손이 봉함을 받은 송나라의 공족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시골의 무사였다.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약288센티미터)으로 '장인'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마을의 늙은 선생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릴 때부터 제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하며 고실, 즉 예로부터의 종교의례·제도·관습에 밝았다고 한다. 이윽고 17세 때부터 말단 관리가 되어 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과 《서경》 등을 배웠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맡아보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의 저자인 주공을 청년 시절부터 사모하였고, 평생 동안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공자는 30세쯤 되자 관리로서의 지위도 오르고, 또한 학문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는 정치는 법률보다는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주공이 다스리던 시대처럼 예의가 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36세 때 노나라에 삼환(맹손·숙손·이손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나라의 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갔다. 공자도 그 뒤를 따라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과 신하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진리를 가르쳤다. 거기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적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경공은 공자를 고문으로 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함과 비현실적임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 안영의 진언으로 좌절되었다. 이에 실망하여 2년 만에 귀국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때 중도재가 되었다. 공자는 52세가 되었을 무렵 대사구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으며, 난신인 대부 소정묘를 죽였다(기원전 496년. 실제로는 그러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때 제나라에서는 사람을 몰래 숨어들어가게 하여 노나라를 위협하려고 하였으나 공자는 그것을 꿰뚫어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고 하는 남자를 잡아서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계환자가 주위 나라의 계략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직을 사직한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공자의 인망은 갑자기 높아져서 기원전 499년에는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외교관도 겸하게 되었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계씨를 타도하려고 여러 가지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막 성사되려는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해 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10년이나 걸린 이 방랑 생활은 공자에겐 가장 괴로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왕들은 올바른 길보다도 효과가 빠른 부국강병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지금 당장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자 미래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공자의 정치가로서의 생활은 끝나고, 교육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중국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서들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안회, 자하, 자로 등이 유명하다. 또 원래 노나라에 있던 연대기를 《춘추》라는 책으로 다시 편찬했다고 한다.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아들인 백어[1]가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었다. 공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하며 슬퍼하였다.[2])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유교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에 전해 내려와 천 수백 년에 걸쳐 중국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사상 [편집]
인(仁) · 의(義) · 예(禮) 충(忠) · 효(孝) | ||||||||||||
공자 · 칠십자 · 맹자 · 순자 · 동중서 · 소옹 · 주돈이 · 장재 · 정호 · 정이 · 주희 · 왕양명 | ||||||||||||
사서오경 · 십삼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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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 · 서원 · 국자감 · 과거 · 육예 · 사대부 · 한국의 유교 | ||||||||||||
공자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때 목표로 삼은 것은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나 신분에 어울리는 인격·능력·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자기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교과서로는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 또는 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書經)> 등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쓰였으나, 한편 공자는 주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의 노나라 연대기 <춘추(春秋)>를 편술(編述)했다는 말이 있듯이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교과서와 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현실을 응시하는 눈, 이 두 가지가 공자의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예'의 '학(學)[3]'이었다. 공자의 경우 '예'란 아직 훗날의 유교처럼 덕목(德目)의 하나는 되지 못했었다. 그것은 공자가 존경했던 주공에 의해서 대성한 중국 고대의 전통문화라는 것과 가깝고 종교의례·제도·관습을 그대로 개괄하는 말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시대, 즉 주왕조 창시기의 사회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킴을 이상목표로 삼았었다. 그는 그 이상목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禮)의 학습·습득(習得)을 제자들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세(亂世)에 살고 인간을 응시하는 눈을 가졌던 공자는 예가 지니는 의미를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추구했으며 예를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인(仁)'을 발견했다. 공자 교육의 중심이 된 '예의 학'은 '인'의 완성이나 혹은 인간형성을 궁극목표로 했던 것이다. 이전 문헌에 나오는 인이라는 말은 남자답다든가 훌륭한 풍채, 외모의 아름다움을 뜻함에 불과했으나 여기서 비로소 공자에 의해서 특별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공자의 사상의 근본은 '인'으로서 공자 스스로는 이를 명백하게 밝힌 바는 없으나, 대체로 박애·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인도주의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질서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4] 남을 부축하며[5],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이고 비상대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요 비보편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이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공자 스스로도 인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 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직관(直觀)이 있다. 그는 처음에 위정자 특히 최고 책임의 소재자(所在者)인 군주에 기대를 걸어 각국을 역방하면서 자기 주장을 설명했었다. 뛰어난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덕을 높여 그 결과 도덕이 고루 퍼져 세상이 저절로 평화가 된다는 바로 그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교육하고 제자들에게 '예'의 학습을 시킴으로써 고전(古典)의 지식이나 정치기술과 함께 인격력인 '인'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의 요로에 참여케 함으로써 당면한 난세를, 유혈이 따르는 실력주의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상이 현실적이어서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그의 사상은 살아 있을 때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 자사[6]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한국·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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