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한국)의 風流(풍류)>
한국의 風流史(풍류사)에서 林亨秀(임형수)와 林悌(임제)만큼 雙璧(쌍벽) 같은 風流快男兒(풍류쾌남아)가 또 있을까? 두 사람은 同鄕(동향 • 羅州(나주)) 에다 同本(동본 • 羅州林氏(나주임씨))에다 同時代(동시대) 人物(인물)이었다.
“자네는 이런 맛을 아는가? 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을 때 말 달려 큰 활을 쏘아 멧돼지 죽여 큰 검으로 살코기 베어들고 은대접에 술 가득 부어 마시는 맛을! 자네가 잘하는 것이야 글자나 주무르는 재주 뿐이지.”
이는 임형수가 莫逆(막역)한 親舊(친구)인 退溪(퇴계)를 놀리며 한 말이다. 어찌 焉敢生心(언감생심) 大學者(대학자)였던 퇴계를 놀리려 함이었겠는가? 聲東擊西(성동격서) - 筆者(필자) 같은 꽁생원을 향한 懷心(회심)의 竹篦(죽비)였을 터이다.
“내가 中國(중국) 五代六朝(오대육조) 時代(시대)에만 태어났더라면 돌아가면서 天子(천자) 노릇을 했을텐데…….”
한국 五千年(오천년) 歷史(역사)에서 이처럼 豪快(호쾌)한 氣像(기상)을 자랑한 이가 또 있었을까? 있다면 임제 한 사람 뿐이리라.
“四方(사방)의 오랑캐가 黃帝(황제)를 일컬었는데 朝鮮(조선)만이 중국을 섬기고 있으니 이런 나라에 살아 무얼하느냐? 내 죽거든 哭(곡)을 하지 말라.”
임제의 豪放(호방)한 器局(기국) 또한 임형수와 難兄難弟(난형난제) 였다고 하겠다. 임제가 오늘날 살아난다고 치자. 이 땅을 自發的(자발적) 植民地(식민지)로 만들어 스스로를 流配(유배)시키고 있는 親日派(친일파) 後裔(후예)들에게 어떠한 頂門一鍼(정문일침)을 놓을 것인지?
임제는 西北地方(서북지방)에서 벼슬살이의 大部分(대부분)을 보냈다.
“칼 두드리며 樓臺(누대) 오르니 의기 높은데
匹馬(필마)의 행색을 쓸쓸히 탄식하네
滄海(창해)에 가을 冷氣(냉기)서려 蛟龍(교룡)은 칩거하고
백두산 구름 깊은 골짜기에 호랑이 울부짖네
세상에 태어나 오랑캐 삼키지 못하니
어느 때에 거듭 洛陽橋(낙양교)에 이르랴?
맑은 술에 취해 말 머리 재촉하니
아스라한 하늘가에 독한 안개 걷히네.”
- 원문 생략 -
이 시는 元師臺(원수대)라는 작품으로 원수대는 咸鏡道(함경도) 摩天嶺(마천령)에 있다. 雄渾(웅혼)한 北伐意志(북벌의지)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現實(현실)에 대한 嘆息(탄식)을 如實(여실)하게 읊었다고 하겠다. 용과 호랑이가 누구의 象徵(상징)인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북쪽 사람들 출발하자 남쪽 사람들도 돌아가네
바다 바라보며 樓臺(누대) 앞에 서니 재촉하는 북과 피리소리
백잔 술 마시고 말에 올라 황금채찍 휘두르니
關山(관산)이 쌓인 세 길 눈도 두렵지 않네.”
- 원문 생략 -
적어도 이 程度(정도)여야 文武兼全(문무겸전)을 自負(자부)할 수 있는게 아닐까? 洪萬宗 (홍만종)은 임제를 가리켜 豪宕不羈(호탕불기)의 선비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임제가 얼마쯤 格式(격식)에 拘碍(구애)받지 않는 선비였는지 逸話(일화) 한 토막 紹介(소개) 해보자.
임제가 술에 취해 말에 오르는데 한쪽 발에는 갗신을, 다른 쪽 발에는 짚신을 신고 있었다. 下人(하인)이 일러주자 임제는 꾸짖었다.
“이 쪽 사람은 갗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저 쪽 사람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朴趾源(박지원)은 이 이야기를 紹介(소개)하면서 모든 일은 어떻게 바라보고 解釋(해석)하느냐의 문제라고 하였다.
假令(가령) “金大中(김대중) 盧武鉉(노무현)은 빨갱이다.” 는 헛소리를 泰然(태연)히 지껄이는 사람들이 많다. ‘개돼중’이니 ‘뇌물현’이니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辱說(욕설)을 내뱉는 자들도 不知其數(부지기수)다. 精神分析(정신분석)의 投射理論(투사이론)에 따른다면 그들은 자신의 淺薄(천박) 刻薄(각박)함을 轉嫁(전가)함에 다름 아니다. 沒風流(몰풍류)는 둘째치고 그처럼 자신의 허물을 뒤집어 씌우며 남의 탓을 하는 瞬間(순간) 實用主義者(실용주의자)로 轉落(전락)할 뿐임에랴. 어찌하여 守舊(수구) 親日派(친일파)들은 中道派(중도파)에게도 ‘빨갱이’ 딱지를 붙이지 못해서 안달인가? 1960년대에 미국에서 容共操作(용공조작)의 狂風(광풍)을 일으켰던 매카시는 自殺(자살)하고 말았음에랴.
“靑草(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紅顔(홍안)은 어디 두고 白骨(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제가 平安都事(평안도사)로 赴任(부임)하며 가는 길에 黃眞伊(황진이) 무덤을 찾아 哀惜 (애석)한 마음을 읊었다가 朝庭(조정)의 쥐코조리들로부터 彈劾(탄핵)을 당하였다.
“北天(북천)이 맑다커늘 雨裝(우장)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鴛鴦枕(원앙침) 翡翠衾(비취금)을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다 하니 녹아 잘까 하노라.”
임제와 寒雨(한우)라는 妓生(기생)이 서로 戱弄(희롱)하며 주고 받은 弄蕩(농탕)한 酬酌(수작)이 없었다고 想像(상상)해보라. 우리의 燦爛(찬란)한 풍류문학사 그 얼만큼 허전해졌을지를!
離人日日折楊柳 (이인일일절양류)
折盡千枝人莫留 (절진천지인막류)
紅袖翠娥多小淚 (홍수취아다소루)
烟波落日古今愁 (연파낙일고금수)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가지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정든 임 못 붙드네
어여쁜 여인들 얼마나 눈물 흘렸으랴?
부연 물결 지는 해가 고금의 시름 자아내네.”
이 시의 제목은 浿江曲(패강곡)이다. 패강은 大同江(대동강)의 옛 이름이었다. 옛 사람들은 離別(이별)에 즈음해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風習(풍습)이 있었다. 버들가지의 再生力(재생력)을 再會(재회)의 象徵(상징)으로 삼은 것이었다. 左右之間(좌우지간) 뭇 星座(성좌)같은 풍류객들이 女心(여심)을 노래했지만 임제만큼 曲盡(곡진)하고 纖細(섬세)한 境遇(경우)가 또 있을까?
十五越溪女 (십오월계녀)
羞人無語別 (수인무어별)
歸來掩重門 (귀래엄중문)
泣向梨花月 (읍향이화월)
“十五夜(십오야) 밝은 달밤에 물 건너온 여인
부끄러워 말 못하고 헤어졌네
돌아와 문 닫고
배꽃에 뜬 달 바라보며 눈물 흘리네.”
閨怨(규원)이라는 시는 짝사랑하는 여인의 애달픈 心思(심사)를 눈 앞에 보듯 如實(여실)하게 그려냈다고 하겠다.
誤落雲鬟金鳳釵 (오락운환금봉채)
游郞拾取笑相誇 (유랑습취소상과)
含羞借問郞居住 (함수차문낭거주)
綠柳珠簾第幾家 (녹류주렴제기가)
“구름처럼 쪽진 여인 금비녀 떨어뜨렸네
한량이 주워들고 친구에게 자랑하네
부끄러움 머금고 사는 집 물으니
버들가지 주렴 드리운 저쪽 집이라고.”
鞦韆曲(추천곡)은 端午(단오)날 그네 뛰다 일어난 靑春男女(청춘남녀)의 싱그러운 揷話(삽화) 한 토막이다. 모든 佳緣(가연)도 그 出發(출발)은 이렇듯 些少(사소)한 실마리의 瞬間(순간) 捕捉(포착)에 있지 않을까?
임제는 39세의 나이에 別世(별세)했다. 그가 썼다는 輓詞(만사)는 다음과 같다.
江漢風流四十年 (강한풍류사십년)
淸名嬴得動時人 (청명영득동시인)
如今鶴駕超塵網 (여금학가초진망)
海上蟠桃子又新 (해상반도자우신)
“浩然(호연)한 풍류 누린지 40년
맑은 이름 얻어 세상 사람 감동시켰네
이제 학 타고 속세를 벗어나면
해상의 仙桃(선도)얻어 새 삶 누리리.”
yellowday 옮김
'역사속의 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 (0) | 2011.04.12 |
---|---|
찰리 채플린이 한 말 (0) | 2011.04.12 |
양귀비가 황후가 되지 못한 이유 (0) | 2011.04.12 |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 (0) | 2011.04.12 |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 (0) | 2011.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