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

yellowday 2011. 4. 12. 07:00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는 미국의 천재적 작가이며 위대한 문학 이론가이다. 그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를 겸했으며, 시와 소설의 이론을 개척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흐 못지 않은 무지와 편견에 둘러싸여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으며 그런 고통을 통해 독창적인 창작을 하고, 그 영향을 후세에 널리 퍼지게 한 역사적 작가이다. 그는 생전에 미국의 문화적 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던 작가이다.

1800년은 당시 신생독립국이던 미합중국 정부의 수도가 워싱턴으로 옮겨간 해로서, 이때의 미국 인구는 불과 500만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9년 전의 일이었다. 포우를 수용하기에는 미국의 문학적 풍토가 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미국 단편소설의 시조로 꼽히는 포우가 활동하던 시기의 미국 작가들은 N.호손으로 세일럼 세관에서 일하며 시종 인류와 죄의 문제에 골몰하였다. 그는 『주홍글씨』(1850) 같은 장편으로 청교도식의 깔끔하고 어두운 비극적 가락을 미국 문학의 흐름 속에 엮어 넣었다. 같은 비극적 의식 속에서 세계를 내다본 H.멜빌의 웅장하고 뜻 깊은 장편소설 《백경(白鯨)》(51)은 그가 죽은 후 1920년에 이르러 미국 독자들이 비극적 의식에 눈뜨게 된 무렵에야 그 진가를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보들레르, 발레리, 스테판 말라르메의 추앙을 받았으며 랭보의 상징시에, 스티븐슨의 해적소설과 줄 베르느의 SF와 코넌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아가사 크리스티, S.S.반 다인 등의 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사실상 추리소설이란 장르의 원조는 에드가 앨런 포이다.) 포우는 독창적인 작가로서, 미의 창조와 '예술을 위한 예술(유미주의)'을 지향한 작가로서, 낭만주의 또는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추리소설의 개척자로서 현대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시는 미국의 낭만주의 시인 에드가 앨런 포우(1809-1849)의 것입니다. 파란 만장했던 포우의 일생은 어려서부터 기구하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다 같이 뜨내기 광대였는데 지방 공연 도중 보스턴에서 1809년 1월 19일 그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미쳐 돐도 지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자취를 감췄으며 그 2년 후에 그의 어머니가 죽어 그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시에 사는 부유한 상인 앨런 John Allan이 그를 양자로 맞아들여 자기의 성을 물려주어 그의 가운데 이름으로 삼아 주었습니다.


부유하고 마음이 어진 양아버지 밑에서 포우는 행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영국의 이름 있는 사립 학교에서 고등 학교를 마친 그는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불과 17세의 소년이었지만 이미 그는 문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폭음을 하고 여기저기 빚을 진 그는 18세도 되기 전에 퇴교를 당하고 맙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약혼녀 사라 Sarah Elmira가 파혼을 하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려는 것을 알게 되어 격앙한 나머지 양부와 싸우고 집을 뛰쳐 나옵니다.

그는 보스턴에 가서 익명으로 『티무르와 기타 시집』 Tamerlane and Other Poems 이라는 시집을 내고는 패리 Edgar A. Perry라는 가명으로 군대에 입대합니다. 이때 그를 극진히 아껴주던 앨런 부인이 죽게 되자 일단 포우는 양부와 화해하고 양부는 그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육군 사관 학교에 사관 생도로 입학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는 사관 학교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 6개월 만에 명령 불복종으로 퇴교당합니다. 이 무렵에는 앨런이 재혼한 후였고 그를 보호해 주던 그의 전처가 없어진 상태에서 포우는 다시 한 번 집을 나오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의 극심한 고생이 시작됩니다. 1831년부터 1835년까지 그는 볼티모어의 숙모 집에 유숙하며 닥치는 대로 잡문을 써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숙모인 클렘 부인 Mrs. Maria Poe Clemm의 딸, 즉 그의 사촌 동생 버지니아 Virginia를 사랑하게 되고 그는 결국 26세 때 당시 13세였던 버지니아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열심히 살아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그의 괴퍅한 성격 때문에 자주 직장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그는 뉴욕 근교의 포드램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여기서 그는 결국 아내를 폐결핵으로 잃고 맙니다. 1847년 1월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포우는 완전히 중심을 잃고 여인들의 뒤를 쫓아다녔습니다. 과도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로 인하여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그는 심한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다 1849년 10월 7일 볼티모어에서 죽습니다.

포우의 짧은 일생은 슬픔과 고뇌로 얼룩져 있지만 그가 남긴 48편의 시에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상징주의를 보여 주었습니다. 단편 서설에서는 정신 분석과 상징주의 수법을 구사하였고, 괴기 소설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전개시킨 19세기 미국 문학의 거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일설에 따르면 헬렌 스텐나드 부인이라는 실제 인물에게 바친 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1847-49년에 이르는 2년 사이에 그가 자살까지 기도했던 어떤 불운한 비련(悲戀)의 그 상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포우는 제1연에서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표랑 끝에 돌아오는 율리시이즈에 비유하고 그가 흠모하던 여인 헬렌을 율리시이즈를 사지(死地)에서 보호해 준 니케 여신에게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제2연에서는 사랑하는 헬렌의 미 특히 짙은 자주빛 머리칼과 우아하고 균형잡힌 얼굴 및 그 날씬한 자태를 보면 그 옛날의 그리스의 영광과 로마의 장엄함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제3연에서는 헬렌을 싸이키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싸이키와 에로스의 사랑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에로스는 밤마다 싸이키를 찾아와 사랑을 나누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밤마다 찾아오는 에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터라 몹씨 궁금하지만 참고 사랑하는 이를 늘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싸이키는 그만 참다 못해 등불을 켜들고 얼굴을 보다가 그만 그 얼굴에 기름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 이후 에로스는 하늘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싸이키는 에로스 신을 찾아 혜메인다고 합니다. 거룩한 나라 성지에서 사랑을 나누다 에로스를 잃고 그곳을 떠나온 싸이키에게 자기의 사랑했던 헬렌을 비교하는 시입니다.

헬렌 스텐나드 부인은 포우에게 사랑의 불길을 질렀던 여인으로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오스의 왕비 헬렌에게 비유하고 자기는 그 여인을 찾아오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쳐들어갔던 율리시이즈(오딧세우스)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율리시이즈는 20년 동안의 방랑 끝에 니케 여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처럼 사랑하는 이는 자기의 안식과 수호의 여신 니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미는 고전적이어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스럽고 장엄했던 문물이 떠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녀의 미는 영광스럽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의 마지막 여신이며 인간의 영혼을 표상하는 여인 싸이키에다 사랑하는 이를 비교하는 것은 너무나 교묘하고 뛰어난 비교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헬렌에게
 
- 에드가 앨런 포우 -
 
헬렌이여, 그대의 아름다움은 내겐 마치
옛날의 저 니케의 범선 같구나.
조용하게 향기로운 바다위로
피로에 지친 표랑자들을 싣고
고향 바닷가에 돌아 오는.
 
오랫동안 떠돌던 거칠은 바다위로
그대의 히야신스(검푸른) 머리칼, 그대의 고전적 얼굴,
그대의 수정(水精)같은 자태는 나를 데려다 주었다
희랍의 영광과
로마의 장엄으로.
 
보라! 저 빛나는 창 모통이에서 나는 보노라
마치 조각처럼 그대가
손에 마노의 램프를 들고 서 있는 것을!
아, 성스러운 땅에서 온
“사이키”여!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