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719- 756), 본명 양옥환, 자 태진.
중국 4대미인 중 최고로 꼽히며 최대의 권력을 가졌던 여인으로, 중국 역사에서 중대한 배역을 맡았던 당 현종의 후비이다.
양귀비는 개원 7년(719년) 용주(지금의 광시 위린용현)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름답고 다방면의 재주가 뛰어났으며, 춤과 노래에도 능해 당 현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양귀비에 대한 당 현종의 사랑은 ‘삼천 후궁이 받을 총애를 홀로 받으니, 치장한 후궁들의 자색도 그 앞에선 빛을 잃네’라며 백거이가 시를 지을 정도였다. 정사에서는 <구당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진(양귀비)은 자태가 탐스럽고 춤과 노래에 능하며, 음률을 잘 알고 총명하였다.” 이 정도면 당 현종이 양옥환에게 홀딱 반했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사실은 양옥환이 귀비에 봉해진 것, 양국충 등 양귀비의 일가친척들이 국가 요직에 배치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귀비의 세 언니도 각각 한국부인, 괵국부인, 태국부인 등에 봉해졌고, 조정으로부터 녹봉을 받는 등 그의 일가친척이 최고의 혜택을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한 가지 있다. 현종이 양귀비를 그토록 사랑했고, 그의 가족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음에도, 정작 양귀비 본인은 어째서 황후로 봉해지지 못한 걸까?
이 문제의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기록한 사료가 없는 관계로, 오늘날의 우리는 오직 관련 기록 속에서 정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사서의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현종이 양귀비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양귀비를 얻기 위해 저지른 ‘비열한’ 수단에 연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을 보면, 양옥환은 원래 당 현종의 아들 수왕 이모의 왕비였다. 즉, 현종은 부정한 방법으로 며느리를 아들의 손에서 가로챈 것. 개원 22년 7월, 이모와 양귀비는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고, 현종은 무혜비(이모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양옥환을 수왕비에 책봉한다. 혼례 후 두 사람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내던 때까지 당 현종은 아직 양옥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인 양옥환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되는데, 처음 본 순간 양옥환의 자색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만다. 양옥환은 이미 이모와 5년째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현종은 이미 그런 것까지 따질 겨를이 없어진 후였다.
아들에게서 며느리를 빼앗기 위해 현종은 매우 ‘치사한’ 계략을 쓴다. 현종은 양옥환이 자신의 모후인 두태후에 대한 효를 다해야 한다며, 태후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출가하여 도사가 되라고 명한다. 양귀비의 자 ‘태진’은 이때 현종이 내려준 도호(道號)이다. 현종은 양귀비가 수왕부를 나와 태진궁에서 살도록 명해 부부 사이를 떼어놓은 다음, 조정대신의 다른 여식을 수왕 이모에게 비로 붙여준다. 그리고 5년 후 양옥환의 수행 기간이 끝나자마자 그를 환속시키고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귀비로 책봉한다. (무려 5년을 기다렸다는 사실!)
이 소식에 아들 이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자신의 여인을 빼앗은 남자가 자신의 생부라는 사실 때문에 화를 꾹꾹 눌러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당대 시인 이상은은 <여산유감 영양비>에서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이모의 슬픔과 혼란, 그럼에도 너무나 빼어난 양귀비의 미모로 인해 현종은 그를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읊으며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 한가지, 당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드물게 매우 개방적이었던 시대다. 문화적, 정책적으로도 오픈 마인드를 가졌던 시기였으며 외래 풍습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던 반면, 전통적인 봉건윤리는 상대적으로 약화했던 시기가 이 때이다. 이러한 시대적, 문화적 환경도 현종이 큰 반대 없이 양귀비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렇게 결과적으로 현종이 양귀비를 얻는 데에는 별 탈 없이 성공할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아들에게서 며느리를 빼앗아 자신의 비로 삼은 것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며, 이모 역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불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종은 민간에서 아들보다 딸이 더 낫다는 생각까지 퍼질 정도로 양귀비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었지만, 단 하나 황후 책봉만은 끝끝내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아무리 당시 풍속이 자유로웠다 해도 아들에게서 빼앗은 황제의 귀비는 역시 윤리적 규범에 있어 어긋난다는 점이다. 왕자의 비였던 여자가 갑자기 황후가 된다면 황실과 국가의 윤리체계까지 무너지게 된다. 둘째, 현종이 기필코 양귀비를 황후로 만들었다면, 아들 이모도 가만히 참고 있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부황에 대한 불만이 쌓인 이모가 정변을 일으키게 될 수도 있는 것. 셋째,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얻게 된 후, 현종은 양귀비의 일가친척을 국가요직과 주요지위에 앉혔다. 이들이 이미 강력한 정치적 세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 상황에 양귀비까지 황후가 된다면 그들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지고, 다른 대신들의 반발과 견제가 빗발치게 되어 정권 안정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다. 이것이 당 현종이 양귀비를 끝까지 황후에 봉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양귀비가 현종의 비가 된 후로는 자식을 단 한 명도 낳지 못했다는 점. 자식이 없었던 정확한 이유까지 알 순 없지만, 이 시대에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큰 죄이자 황후가 되는 길의 커다란 장애임은 분명하다. 당시에는 황후의 자식이 태자에 봉해지거나 태자의 어머니가 황후에 봉해지는 케이스가 일반적이었는데, 반면 양귀비의 경우에는 자신이 낳지 않은 왕자가 태자로 이미 책봉된지 오래였고, 태자의 황위 계승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양귀비는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양귀비가 황후에 책봉될 아무런 명분이나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설사 억지로 양귀비를 황후에 올린다 하더라도 태자 및 이모, 조정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을 것이다. 현종으로서는 당연히 이런 모험까지 감수하며 양귀비를 황후로 봉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양귀비가 황후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받은 대우는 거의 황후와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궁궐 안과 밖에 자자했던 그에 대한 칭송과 소문은 양귀비의 실제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말해준다. 양귀비 한 사람을 위해 궁중의 제도와 법규가 하루아침에 바뀔 정도였다. 양귀비는 황후의 ‘타이틀’은 갖지 못했지만, 대신 황후의 ‘실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보통 황후보다도 월등한 존경을 받았다. 양귀비도 현종에게 황후가 되게 해달라고 조르지 않았던 점도 그가 똑똑한 전략가였음을 말해준다. 이미 황후로서의 실권과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껍데기에 불과한 데다 위험의 불씨까지 안고 있는 황후 타이틀이 뭐가 중요하겠냐는 아주 전략적인 생각이다. 양귀비가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영원히 양귀비가 실질적인 황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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