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9.07 03:38
중국사의 전성기를 말할 때 '강·옹·건 시대'를 뺄 수 없다. 청나라 4대 강희제부터 아들 옹정제, 손자 건륭제에 이르는 134년이다. 지금 중국의 엄청난 땅덩어리는 이때 정해졌다. 6000만명이던 인구도 이 기간 2억명으로 늘었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라는 명예도 함께 누린다. 그러나 옹정제에겐 유독 '잔인한 독재자'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강희제는 아들이 서른다섯이나 됐다. 강희제가 일찌감치 큰아들을 황태자로 지명하자 신하들이 아들에게 줄 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황태자를 폐위했다. 황자(皇子)들 간에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뜨거웠다. 서로 헐뜯고 고자질했다. 1722년 강희제가 죽게 되자 아들들이 모였다. 대신(大臣) 롱고도가 방에 들어가 황제의 뜻을 받아왔다. 계승자는 넷째 아들, 훗날 옹정제였다.
▶강희제는 아들이 서른다섯이나 됐다. 강희제가 일찌감치 큰아들을 황태자로 지명하자 신하들이 아들에게 줄 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황태자를 폐위했다. 황자(皇子)들 간에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뜨거웠다. 서로 헐뜯고 고자질했다. 1722년 강희제가 죽게 되자 아들들이 모였다. 대신(大臣) 롱고도가 방에 들어가 황제의 뜻을 받아왔다. 계승자는 넷째 아들, 훗날 옹정제였다.
▶옹정제는 소문을 퍼뜨린 이복형제들을 '개' '돼지'라 부르고 감옥에 가둬 죽게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후계자 이름을 적은 종이를 황궁 안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쓰인 액자 뒤에 두고 "내가 죽으면 열어보라"고 했다. 그러곤 "한번 후계자로 마음에 뒀더라도 잘못하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황자들은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황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옹정제식 황위 세습 제도는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엊그제 만주족 고향 랴오닝성에서 옹정제의 '황위 찬탈' 누명을 벗겨줄 강희제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유서에는 "넷째 아들은 인품이 남다르고 생각이 깊어 대통(大統)을 이을 만하다"고 돼 있다. 유서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쓰여 있어 한자 몇 글자 고치는 것으로는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돼 있다고 한다. 300년 전 중국 황실 깊숙한 곳에서 벌어졌던 음모와 다툼이 새삼 권력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