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안진경(서예가)

yellowday 2011. 4. 10. 21:59

안진경 (顔眞卿 ; 709~785)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로서 자는 청신(淸臣)이며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 출생이다.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남북조시대 이래로 그의 선조 가운데 안등지(顔騰之)·안지추(顔之推)·안사고(顔師古)·안근례(安勤禮) 등이 모두 고문자학(古文字學)을 연구했고 서예에도 뛰어났었다. 인척관계에 있던 은영명(殷令名)·은중용(殷仲容) 부자도 또한 당대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리고 안진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종이와 붓이 없었으므로 담벽에다 황토로 연습하여 서예를 익혔으며, 해서(楷書)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맞았으며, 이때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朝廷)을 위하여 싸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헌부상서(憲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감금당하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즉, 평론가들은 〈중흥송마애 中興頌磨崖〉·〈원차산비 元次山碑〉·〈송광평비 宋廣平碑〉·〈안씨가묘비 顔氏家廟碑〉 등과 같은 만년의 작품을 높이 친다. 〈제질문고 祭侄文稿〉의 필적, 〈제백부고 祭佰父稿〉· 〈쟁좌위 爭座位〉· 〈채명원 蔡明遠〉· 〈송류태충서 送劉太沖敍〉 등의 첩(帖)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면서도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변화무쌍하며 전서체(篆書體)와 주문(文)을 겸비했다. 또한 스스로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한 획도 2왕(二王:王羲之·王獻之 부자)의 필체와 비슷한 것이 없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안진경의 서예와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오도현(吳道玄)의 그림을 최고의 모범이 된다고 평했다. 안진경의 서예는 후대의 유공권(柳公權)·양응식(楊凝式)·소식·황정견(黃庭堅)·미불(米)·채경(蔡京)·조병문(趙秉文)·동기창(董其昌)·왕탁(王鐸)·유용(劉墉)·전풍(錢)·하소기(何紹基) 등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 경의 가문에서 만들어놓은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대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과거시험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다. 명(明)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 이르러서는 간행된 서책의 글자체가 모두 안진경체로 되었는데, 이른바 '노송체자'(老宋體字)로서 수백 년 동안 성행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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