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6.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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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덕희, '책 읽는 여인' - 18세기, 비단에 담채, 20×14.3㎝, 서울대박물관 소장
부덕(婦德)은 바느질하고 누에 치고 길쌈하는 나날에서 길렀을 뿐, 독서와 학문은 본디 여자의 몫이
아니었다. 글을 깨쳐도 한문 아닌 한글이 쉬웠다. 그나마 몇 자 끼적일 줄 알면 신통하게 생각했다.
조선 후기 문인 이옥이 쓴 시를 보면 그 정황이 짐작된다.
'일찍부터 궁체를 연습했기에/
'이응' 자 쓰면 위에 뿔이 있지요/
시부모님 보고 기뻐서 하신 말씀/
언문 여제학(女提學)이 나왔구나.'
배우고자 하는 속은 같다. 열성만큼은 여자라고 숙지지 않았다. 이 장면이 본보기다. 독서하는 여인이
단독 캐스팅된 그림이다. 속화에서 주연급 여배우는 흔히 기녀다. 보암보암에 이 여인은 사대부 권솔이다.
맵시에서 티가 난다. 올림머리 야단스럽지 않고 저고리 길이는 맞춤한데, 곁마기에 두른 회장(回裝)이
단정하다. 파초 잎이 시원스레 드리운 여름날, 가리개에 그려진 새는 마냥 조잘거린다. 개다리 의자에
앉은 그녀는 무릎 위에 책을 펴든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책에 북 박힐 듯 끈지다. 고요한 독서삼매다.
얼굴이 곱다래서가 아니라 몸가짐에서 뱀뱀이까지 풍긴다.
문인화가 윤덕희(尹德熙·1685~1776)의 작품이다. 그는 아버지가 윤두서이고 아들이 윤용인데,
삼대가 내리 화업(畵業)을 이은 명문이다. 그림은 필치가 수더분해서 정이 간다. 여인이 얼마나 정독하는지 보이는가. 행간을 놓칠세라 검지로 또박또박 짚는다. 독서 캠페인에 홍보대사로 내세워도 손색없을 그녀다. 여자로서 책 읽고 글을 쓰기가 고달픈 시절이 있었다. 19세기에 요절한 여성시인 박죽서의 시에도 나온다.
'스물세 해 동안 무얼 하고 보냈나/
반은 바느질하고 반은 시를 지었지.'
하기야 남자도 마찬가지다. 낮에 밭 갈고 밤에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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