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 꼭대기에 있던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07)는 신립(1546~ 1592) 장군이 북병사로 있을 때 탁본을 해 오면서 세상에 알려져 17세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와 낭선군 이우의 '대동금석첩'에 실려 있다. 그러나 영조 때 유척기가 얻은 탁본은 비의 반쪽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조 때 홍양호는 이를 이상히 여겨 1790년 함흥 통판으로 부임하는 유한돈에게 황초령비<사진>의 존재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몇 해 뒤 전해오기를 황초령은 함흥에서 갑산 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조정에서 자주 이 비의 탁본을 요구하자 그곳 백성들이 벼랑 아래로 밀어뜨려 버린 것이라고 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1832년, 마침 절친한 벗인 권돈인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황초령비의 파편을 찾아볼 것을 권유했고 권돈인은 마침내 하단 부분을 찾아내어 관아로 옮겨 보존하였다. 이때 추사는 말하기를 비편을 찾아낸 것은 경하할 일이지만 이 비는 제 자리에 있어야 신라의 강역이 거기까지 미쳤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니 책보다 돌덩이가 더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며 다른 대책을 강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추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1852년 추사가 북청에서 두 번째 유배를 살고 있을 때 마침 후배인 윤정현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또 황초령비의 원위치 복원을 부탁했다. 윤정현은 황초령 고개 바로 아래에 있는 중령진에 옮겨놓으면서 이건기와 함께 추사가 써 준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것이 황초령비 재발견 시말기이다. 이후 1931년에 이 고을 아이 엄재춘이 비편 한쪽을 개울가에서 발견하였고, 현재는 함흥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하여 황초령비가 있던 곳은 다시 아무런 역사적 흔적이 없게 되었고 동네 이름만 진흥리로 되어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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