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0일(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으로, 전술적으로는 미국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략적으로 결국 목적한 통상조약 체결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조선은 이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배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면서 셔먼호 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두 차례나 조선 원정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결국 1871년 미국은 일본과 류큐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포함외교에 따라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마침내
조선원정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 공사 로 (Low)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에게 해군 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했다. 미국은 지금의 인천국제공항 근처까지 온 다음, 강화도로 진격하였다.
경과
앞서 1866년(고종 6년) 음력 7월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사과 및 책임 추궁, 그리고 통상조약을 무력
으로라도 체결할 목적으로 함대가 발진하였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은 청나라 주재 공사 프레드릭 로우와 90문의 화포, 800명의 병력을 대동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일본의 나가사키 를 출발하여 원정에 나섰다.
- 5월 16일 - 나가사키 출항
- 5월 19일(음력 4월 1일) - 미군, 경기도 남양만에 도착. 이후 해로를 탐사하면서 북상 돌입
- 5월 26일(음력 4월 8일) - 강화도 해역까지 북상, 강화 해협 물치도 앞바다를 함대의 정박지로 결정
- 6월 1일(음력 4월 14일) - 미군은 조선에 탐측을 일방적으로 통고.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손돌목을 지나려다 강화도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고 퇴각.
- 이후 미국은 포격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함. 조선 정부는 미국 함대가 허락 없이 해협을 항해하는 것은 영토침략
- 행위이므로 협상이나 사죄를 할 수 없다고 요구를 거절, 협상 결렬.
전투
- 6월 10일(음력 4월 23일) - 미군 상륙부대는 포함 2척을 앞세우고 육전대(해병대) 644명을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 상륙시키고,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하였다.
- 6월 11일(음력 4월 24일) - 광성진(廣城鎭), 광성보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진무중군 어재연 이하 600명의 조선군이
- 지키고 있던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미군과 맞서 싸웠다. 미군은 상륙에 앞서 함포사격을
- 실시했는데, 이 와중에 광성진의 화약고가 폭파되었다.
- 조선군은 개인지참 분량의 총탄만으로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 끝에 어재연 장군 이하 조선군 243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 미군이 진채를 장악하자 경부상자 100여명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중부상자 20명은 포로로 잡혔다.
- 미군은 전사 3명, 부상자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의 패배로 끝난 전투였으나, 군인정신 곧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 용감함에 있어 조선군은 결코 미군에 뒤지지 않았다.
“ |
조선군은 미군에게 돌을 던지고 창칼로 대적하다가 무기를 놓치면 흙을 던져 눈에 뿌렸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 부상병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포로로 잡힌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
” |
[1] 조선 정부는 통상 교섭 자체를 거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조선군의 결사항전과 정부의 통상거부로 당연히 더 이상 오래
머물 수 없었던 미군은 조선과 통상이라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7월 3일(음력 5월 16일)에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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