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한국식 한자음 그대로 운양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단
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열강 세력에 앞서 조선 진출을 시도하는 계획이 늦어짐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뒤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자신들이 개항을 강요당했던 그 수법을 자신들이 조선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선에서도 문호개방의 요구가 차츰 무르익자, 일본은 안으로 개화사상에 입각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밖으로의 침략 정책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75년(고종 12년)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운요호는 다시 영흥만에까지 북항하여 해로의 측량과 시위를 겸하고 돌아갔다.
결과
음력 8월 21일(양력 9월 20일)에 일본군은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인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면서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한편으로 부산에 전함을 파견하고 병사를 상륙시켜 함포외교를 계획했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1876년(고종 13년)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 포격에 대한 힐문(詰問)과 개항 요구를 강요했다. 그해 2월에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5척으로 강화도에 이르러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하여 왔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전권대신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조선·일본 양국 사이에
강화도 조약의 조인을 1876년 음력 2월 3일 보게 되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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