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요동 정벌(遼東 征伐)

yellowday 2013. 2. 2. 10:16

 

요동 정벌(遼東 征伐)은 명나라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고려요동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져 고려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정도전 역시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요동 문제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랴오둥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의 쟁탈 지역이 되어 왔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고조선이 전쟁에 패해 서쪽 경계가 수천리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고조선의 판도에서 벗어났다.

전국시대 말엽에는 연나라동호(東胡)를 물리치고 이 지방을 점령하였으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한나라 때는 여기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는데, 고구려가 일어나 한사군을 몰아내고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는 요양 지방에 요동성을 쌓고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삼았다. 612년, 수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퇴되어 물러났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요동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98년에 건국된 발해가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년간 발해의 영토로 들어갔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면서 요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였다.

 철령위 문제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고려1356년(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관서 지방(關西地方)와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다. 그러나, 명나라가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1387년(우왕 13),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1388년(우왕 14) 음력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1]

조정은 막강한 신흥 세력인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친명파(親明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원나라와 다시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먼저 장악하여 명나라의 동진을 막자고 주장하는 친원파(親元派)로 국론이 갈리기 시작했다.

 

의의

 

이 사건은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통해 나라를 재건하려던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권문세족, 문벌 귀족, 불교)과 근본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흥 세력(신흥 무인, 신흥 사대부, 유교)의 충돌이 빚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군권(軍權)을 장악한 이성계

4년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