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은 고려 말기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요동 정벌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 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回軍)한 사건이다.
원인
명황제의 요구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이에 우왕이
최영과 비밀리에 논하여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반대자가 많았다. 이자송은 이에 반대하다 최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경과
우왕은 서경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과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이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평양에서 송도(松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급히 반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 고양)에 귀양 보내졌으며,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당하였다.
결과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는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조선 왕조 창건의 기초적 계단이 확립되었다.
이를 말미암아 14세기 말엽에 있었던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탈을 격퇴시킨 이성계 등의 무장들을 주축으로 하는 신흥 무인
세력들은 친원 권문세족에 대항하기 위해 성리학 신유학을 수입하여 학식을 연마해 중앙 정계로 진출한 친명 신진
사대부들과 연계하여 기성의 정치 세력(최영 등)을 숙청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기반을 공고히 한 이후에,
1392년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를 요구하여 조선을 개국을 하게 되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1]를 들며 반대하였다.
-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논란
당시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19일이 걸렸고, 위화도에서 14일 체류하였으며, 회군에 9일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들어 이성계는
출병 때부터 고의로 병력을 느리게 진군시켰다는 논란이 있다. 또한 회군 시에는 “일부러 사냥을 하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라고 하였음에도 출병 때보다 2배 이상 빠르게 왔다는 사실도 또한 논란이 되고 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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