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둔덕이다. 엄마는 아기를 조심스레 무릎에 앉히고 바닥에 둔 바구니에서 꺼냈을 포도송이를 아기에게 쥐여준다. 신이 난 아기는 발가락을 꼬물대며 앙증맞은 두 손으로 포도를 집으려 하고, 그들이 타고 온 당나귀는 나무에 묶인 채 얌전히 서 있으며, 아빠는 멀찍이서 아기와 엄마에게 줄 밤을 따는 중이다.
청명한 하늘빛, 온화한 땅의 질감과 바람에 한들대는 아기의 얇은 옷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이 서정적인 그림은 16세기 초,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가 제라르 다비드(Gerard David·1460~1523)의 1510년작 '이집트로 피신 중의 휴식'<그림>이다.
마치 단란한 가족 소풍을 즐기는 듯한 이들은 사실 헤로데의 영아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다. 성경에는 성(聖)가족의 이집트 피신이 짧게 언급되고 말았지만, 신의 인간적인 고초와 초인적인 기적을 원하는 이들은 수많은 전설과 외경 속에서 여행 중에 이들이 겪었던 위기와 경이로운 사건들을 다채롭게 묘사했다.
중세로부터 많은 미술가가 기적을 행하는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집트로의 피신 장면을 그렸지만, 다비드는 도중의 휴식에 초점을 맞추고 로마시대가 아니라 당대 유럽의 풍경을 배경으로 성가족의 정감 어린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전원의 한가로운 피크닉에서는 도피의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중앙을 차지한 포도는 성찬식의 포도주, 즉 십자가형을 받고 흘리게 될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다비드가 그린 진짜 기적은 자식에게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어머니, 마리아의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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