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23] 블루 이글

yellowday 2013. 1. 18. 23:08

입력 : 2011.08.02 23:40

어두운 물감이 어지럽게 칠해진 캔버스 위에 낡은 티셔츠가 거꾸로 붙어 있고, 전시장 바닥까지 늘어진 전선 끝에는 전구가 매달려 있다.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1925~2008)의 '블루 이글'〈사진〉이다. '블루 이글'이라는 제목은 작품에 붙어 있는 엔진오일 깡통의 제품명이다. 파란색 깡통은 형편없이 찌그러졌지만 근엄한 '푸른 독수리' 로고만큼은 여전히 번쩍거린다.

회화와 조각, 미술과 사물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이런 작품을 작가는 '컴바인(combine·조합)'이라고 일컬었고, 평론가들은 '정크 아트(junk art·쓰레기 미술)'라고 했다. 실제로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버려진 옷가지나 빈 유리병, 폐타이어 등 수명을 다해 버려진 잡다한 생활 쓰레기로 가득하다.

아름답고 고상해서 보고만 있어도 즐겁고 감동적인 '미술'을 기대했다면, 누추하고 지저분한 '블루 이글' 앞에서 실망하고 불쾌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은 쓰레기인 그들도 한때는 주인에게 기대와 설렘을 안겨주었을 새 티셔츠이자 신제품 오일이었을 것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받다 버려진다는 것은 무척 쓸쓸한 일이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작품이 삶과 동떨어진 고고한 것이 아니라 쓸쓸하고 비루한 생활의 일부이길 바랐다. 사실 평범한 우리는 유쾌와 감동보다는 실망과 분노, 불쾌와 우울을 훨씬 자주 느끼며 살아가지 않는가. 익숙한 그 어두운 감정을 고상한 미술관에서 느껴보고 싶다면 지금 '블루 이글'을 전시 중인 덕수궁 미술관의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전을 찾아가도 좋을 것이다. 실망과 불쾌가 연민과 애정으로 변하는 의외의 경험을 누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