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도 서양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신의 아기'를 의미하는 '테 타마르 이노 아투아'(1896년)라는 그림에는 타히티 여성이 등장하지만 마구간을 배경으로 하고 후광을 쓴 아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종교화 '성탄'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은 고갱과 같이 살던 파우라가 낳은 아들이 크리스마스 즈음에 죽은 것과 관련해 한편으로 화가 자신 아들의 탄생과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침대 뒤에 아기를 안고 있는 후드를 쓴 남성은 고갱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의 영(靈)을 나타낸다.
- ▲ '테 타마르 이노 아투아'
고갱은 타히티에서 파리의 평론가·화상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중간에 파리로 돌아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을 팔려고 했다. 이런 일은 그가 과연 타히티인들과 동화되어 살 생각이 있었는지 의심이 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00년에 그는 타히티보다 더 오지인 마르키즈 군도(群島)의 히바오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쾌락의집'이라고 새긴 현판을 단 집에 살면서 고갱은 프랑스 총독부 관리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가난과 폭음, 그리고 병고에 시달리다 1903년에 외롭게 죽어갔다. 당시로서는 그의 삶이 파격적인 것이었으나 어떤 점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로 뻗어가던 유럽 제국주의가 낳은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