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59] 레오나르도 후지타

yellowday 2013. 1. 5. 07:53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의 파리의 화단은 그야말로 새로운 전성기를 누렸다. 여러 나라에서 온 미술가들이 파리에서 저마다 개성 있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후지타 쓰구하루(1886~1968)도 그중의 하나였다. 동경미술학교(현재의 동경예대)를 졸업하고 1913년에 27세의 나이로 파리에 온 후지타는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드로잉 실력으로 유백색 바탕에 누드 여인과 고양이를 그려 유명해졌다.

후지타의 1947년 작‘나의 꿈’
그는 일본 전통미술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금박을 사용하기도 하고 유화에 먹을 사용하는 등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수틴, 스페인의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후지타는 소위 '에콜 드 파리'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1933년 일본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일약 일본화단의 스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서양화가 김환기나 김병기도 자신들이 드나들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앞머리를 단발로 한 후지타를 통해 파리 화단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일본은 전쟁화 전담기구를 설립하고 전쟁기록화, 또는 일본군의 전쟁을 영웅화한 성전화(聖戰畵)를 220여점 제작하였으며, 이 작품들은 군에 헌납되어 순회 전시되었다. 유명한 스타 후지타는 군부가 가장 눈독들이던 화가였다. 그는 전쟁화가로 위촉되어 16점의 대작을 제작했다. '앗츠 섬 옥쇄(玉碎)' 같은 작품에서 그는 치열한 전투의 장면을 웅장한 구성과 뛰어난 사실적인 묘사로 재현했다. 후일 자신의 행위는 전시하(戰時下)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전 이후 전쟁화가들은 전범으로 몰렸고 가장 규탄을 받은 화가는 후지타였다.

1949년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존경했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름을 따서 레오나르도 후지타로 개명했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프랑스의 미술관에 기증했으며, 다시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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