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58] 잭슨 폴록

yellowday 2013. 1. 5. 07:3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뉴욕으로 옮겨가면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는 잭슨 폴록(1912~1956)이었다. 그는 10대부터 알코올 중독으로 상담을 받을 정도로 문제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부터 거대한 캔버스를 마루에 놓고, 그 위에 물감을 붓거나 흘리고 뿌리는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가장 주목해야 할 추상화가로 등장했다. 형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조밀하고 복잡하게 엉킨 선과 색채가 가득 찬 화면은 화가의 격정적인 감정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폴록의 '집중'
경제공황과 2차대전의 어려움을 겪고 난 시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자기 확인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라고도 하고,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고 불렀다. 이제 폴록을 중심으로 뉴욕에는 미국적 회화의 분위기가 형성됐으며, 이들의 그림은 유럽미술에서 독립된 새로운 것이었다.

정작 폴록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작업 중인 그의 사진이었다. 물감을 던지고 뿌리는, 신들린 듯한 작업 광경을 찍은 한스 네이머스의 사진이 매스컴에 등장하면서 그는 일약 모든 규범과 구속을 무시하는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유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미국 현대미술의 해외 순회 전시에 수차례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에 폴록의 그림은 무엇이든지 가능한 미국을 상징하는 대외적 홍보 도구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폴록 자신에게 사진 촬영은 불행한 일이었다. 네이머스는 사진을 찍을 때 폴록에게 작업을 언제 시작하고 언제 중단할지 일일이 요구했다. 이로 인해 폴록은 실제 작업할 때와 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꼈고 이런 촬영은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폴록의 명성이 최고점에 도달했던 1956년, 자동차 사고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배우 제임스 딘과 마찬가지로 그는 전설이 되었고, 그의 사고가 위장자살이었다는 설이 아직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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