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농민 화가 밀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된 위인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밀레는 교육을 잘 받은 부농의 아들이었고 바르비종에서도 하녀를 둘 정도였으며, 파리를 떠난 이유도 단순히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잘못된 밀레의 신화는 그의 친구이자 화상이었던 상시에가 밀레의 전기(傳記)를 미화시켜 펴냈기 때문이다.
- ▲ 이삭줍기
청교도 정신이 뿌리 깊은 개척민이었던 미국인들에게 땀 흘리고 일하는 밀레의 농민상은 도덕적 우월성과 인간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밀레는 성인화가와 같은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그림의 복사본은 교회, 학교 그리고 각 가정에 걸릴 정도로 대중적 우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밀레가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미술은 사회비판적 미술이 아니라 근대화되어 가던 우리 사회에 농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 전원미술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