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도 명화는 명화다. 중국 명나라 문인 동기창(董其昌)은 '소중현대(小中現大)'라며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고 했다. 리움의 단원 소장품 특별전에서 나를 오랫동안 진열장 앞에 붙잡아 놓은 것은 '병진년화첩'(보물 782호)과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였다.
- ▲ 단원 김홍도의 자화상
'병진년화첩'은 단원 나이 52세 되는 1796년에 그린 산수화 10폭, 화조화 10폭을 한 권의 첩으로 묶은 것으로 그중에는 도담삼봉·사인암·옥순봉 등 단양의 풍광을 그린 것이 많다. 이는 단원이 단양 옆 고을인 연풍의 현감을 3년간 지냈기 때문이다. 단원이 연풍현감으로 나간 것은 정조의 어진(御眞)을 제작한 공으로 받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단원은 풍류의 화가였지 행정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임기 말년에 '연풍의 행정이 해괴하다'는 보고가 있어 관찰사의 감사를 받고 끝내는 파직되고 말았다. 그때의 일을 '일성록(日省錄)'에는 "단원은 천한 재주로 현감까지 되었으면 더욱 열심히 일했어야 했는데 동네 과부 중매나 일삼고 토끼 사냥을 간다고 병력을 동원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이 파직 이유라면 단원으로선 좀 억울한 면도 있어 보이지만 이로 인해 그가 모처럼 자유인이 되어 '병진년화첩' 같은 명화를 남기게 된 것은 한국미술사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포의풍류도'에는 이 무렵 단원의 심정이 담긴 자화상적 이미지가 들어 있다. 편안한 복장으로 비파를 켜고 있는데 곁에는 책·종이·연적·향로·술병·파초 잎·생황·긴 칼 등 선비의 문방지물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그림 왼쪽에는 자필로 "흙벽에 아름다운 창을 내고/ 여생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나 읊조리며 살리라"라는 글을 써넣었다.
이때부터 단원은 '병진년화첩'처럼 조선적 시정이 물씬 풍기는 산수화와 '포의풍류도'처럼 옛 선비의 여유로운 삶을 담은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때마침 단원은 나이 50대로 접어들면서 원숙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었으니 연풍현감 파직 이후가 사실상 단원 예술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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