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차칸 남자'

yellowday 2012. 9. 14. 23:21

입력 : 2012.09.14 22:39

서른넷에 떠난 소설가 김소진은 영문학도였지만 정확하면서도 맛깔진 우리말을 구사했다. 방위병 1년 반 동안 2000쪽 넘는 '새우리말큰사전'을 '꼼꼼하고 무식하게 씹어 먹으며' 우리말을 공부한 덕분이다. 대학 노트에 그만의 사전을 촘촘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그런 김소진이 '고아떤 뺑덕어멈'이라는 단편을 쓰고 책 제목으로도 내세웠다. '고아떤'은 소설 속 실향민 아버지가 옛 연인의 사진에 삐뚤빼뚤 써둔 글씨다. '고왔던'을 잘못 쓴 것이지만 누구도 책잡지 않았다. 거기엔 굴곡진 아버지 시대 삶이 배 있다.

▶자폐 청년이 마라톤을 완주해내는 영화 '말아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그림일기에 '내일 할 일 말아톤'이라고 써놓은 데서 뽑은 제목이다. '차카게 살자'는 1999년 시작한 연작 만화다. 감옥에서 나와 '착하게' 살려고 고교생이 된 조폭 두목을 그린다. '차카게 살자'는 개그맨이 조폭을 흉내 내며 팔뚝에 문신처럼 썼다. 영화 '해바라기'에선 새 삶을 살고 싶은 깡패가 '생활신조'로 삼는다. 조폭에 대한 풍자뿐 아니라 가수 이승환이 자선 콘서트 이름으로 내세울 만큼 유행어가 됐다.

KBS가 며칠 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 남자'라는 드라마를 시작했다. 시중 유행어 '차카게 살자'부터 떠오르는 제목이다. 그제 한글단체 한말글문화협회가 법원에 KBS가 '차칸'이라는 제목을 못 쓰게 해달라고 가처분신청을 냈다. 앞서 한글학회와 국립국어원도 KBS에 공문을 보내 "공영방송의 우리말 파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며 '차칸'을 '착한'으로 바로잡으라고 했다.

영국에선 공영방송 BBC가 쓰는 영어가 곧 표준 영어다. 1926년부터 발음국을 두고 끊임없이 올바른 영어를 연구하고 사용해 온 결과다. BBC 국제 라디오는 영어를 배우는 세계인에게 가장 정확한 교재다. 청취자가 세계 150개 도시에 1억8000만명을 넘는다. 일본인 70%는 공영방송 NHK의 일본어를 표준어로 여긴다는 조사도 있다. NHK는 1934년 언어학자·국어학자·작가·심리학자들로 방송용어위원회를 만들어 방송 언어를 가다듬어 왔다.

▶국어기본법과 방송법, 방송심의규정은 방송이 바른말을 쓰도록 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이라면 법과 규정을 일일이 갖다댈 필요도 없다. 그러나 KBS는 "뇌를 다친 여주인공이 일기에 쓴 '차칸 남자'를 제목으로 삼은 것"이라며 '말아톤'처럼 양해해 달라고 했다. 영화도 만화도 잘못된 맞춤법을 쓰는데 무슨 문제냐고 하는 셈이다. 설마 공영방송이 어때야 하는지 모르거나 공영방송의 자존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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