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붉은색 벗고 五方色으로… 잔혹한 세상을 그리다

yellowday 2012. 8. 27. 16:51

입력 : 2012.08.27 03:52

[이세현 '플라스틱 가든' 展]
분단의 아픔 담은 '붉은 산수'… 중국·홍콩 등에서 인기
신작 '레인보우' 시리즈, 盆栽로 망가진 자연 나타내… 오방색으로 과감한 변신 시도

1989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 화가는 조각·설치·드로잉 등 다방면에 손을 뻗었지만 17년간 작품을 한 점도 못 팔았다. 승승장구하는 학과 선후배들을 보며 쓰라려 하다 2004년 '작업에만 몰두하겠다'며 전 재산 7000만원을 탈탈 털어 영국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2006년 첼시예술대학원 졸업전시에서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전시에 내놓은 그림 넉 점이 영국·스위스·미국 컬렉터들에게 모두 팔린 것. 붉은 유화 물감을 이용, 한국의 산을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풍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사이사이 삼엄한 군(軍) 초소, 포탄, 핵폭탄 구름 등을 집어넣어 분단의 현실을 시사한 작품이다. 그후로 6년. 이세현(45)은'붉은 산수의 화가'로 화단(畵壇)에 각인됐다.

이세현은“나는‘빨간 작가’로 기억되기보다는‘좋은 작가’로 성장하고 싶다”고 했다. 뒤의 그림은 분재를 소재로 한 신작‘Rainbow in Black’.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영국 학생들 틈에서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야만 했다. 군 복무 시절 밤에 보초를 설 때 야간 투시경을 쓰고 군사분계선을 바라보면 우리 산하(山河)가 온통 녹색으로 아름답게 보이던 생각이 났다. 그 녹색 그대로 그리면 그냥 '예쁜 그림'으로 그치고 말 것 같아 일부러 정반대인 붉은색으로 그렸다."

'붉은 산수'는 이세현에게 어린 시절 반공 교육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붉은색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붉은색으로 그림은 물론이고, 글씨조차 써본 적이 없었다. 금기(禁忌)를 극복하기 위해 화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냈더니 오히려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더라"고 했다.

이세현의 2012년작‘Between Red 152’. /학고재갤러리 제공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고 이름 지은 이 시리즈로 그는 오랜 무명(無名)의 설움을 말끔히 벗었다. 여러 화랑에서 러브콜이 왔고 런던 소더비, 홍콩 크리스티 등 경매에서 추정가를 뛰어넘는 가격에 그림이 판매됐다. 지난해와 올해 홍콩아트페어에서도 그림이 완판됐고, 지난해엔 중국 민생미술관이 가로·세로 3m가 넘는 대작 3점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미국 페이스갤러리 산하 판화 전문 갤러리인 페이스 프린츠(Pace Prints)에서 작품 3점이 판화로 제작됐다. 페이스 프린츠는 피카소·앤디 워홀·무라카미 다카시 등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만 취급하는 곳. 이세현은 한국 작가로는 이우환(76)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에서 판화를 찍었다.

요즘 이세현은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붉은 산수'의 허물을 벗고 변태(變態)를 준비 중이다. 29일부터 10월 14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플라스틱 가든(Plastic Garden)'이 그 신호탄. 회화 21점, 조각 4점이 나오는 이 전시에서 그는 신작 '레인보우(Rainbow)' 시리즈를 선보인다. 그의 고향 거제도에서 어린 시절 집집마다 볼 수 있었던 고무 대야 속 분재(盆栽)와 마구잡이 개발로 망가진 우리 자연을 함께 그려 인간과 문명의 잔혹함을 표현했다. 이번 시리즈에선 '빨강'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대신 작가가 어린 시절 굿판이나 성황당에서 보면서 '아름다우나 잔혹한 빛깔'이라고 여겨온 오방색을 과감히 사용했다. 그의 아이콘이 된 '붉은 산수'와는 판이한 느낌.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그에게 신작에 대한 반응이 두렵지 않은지 물었다. "아기 새가 첫 날갯짓을 하려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두렵겠죠.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가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잖아요. 남들이 좋아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악평을 극복하지 못하면 작가로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02) 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