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21] 언덕 위 청동집과 나무집, 삶과 예술이 공존하다

yellowday 2012. 8. 22. 08:44

 

[생활·작업 공간이 한곳에… 파주 헤이리 백농 스튜디오]
1층 작업실 2층은 사적 공간
한글 서예 하는 건축주 닮아 'ㄹ'과 'ㄷ' 모양의 두 개 동
산비탈에 자리 잡은 각 층 바닥은 모두 땅과 닿도록 설계

건축가 김종대씨
영국 웨일스 헤이온와이와 프랑스 남부 생폴 드 방스는 세계적인 '예술인 마을'로 이름이 높다. 각각 희귀한 고서(古書)가 숨겨진 헌책방 마을, 피카소·모딜리아니가 그림을 즐겨 그리던 마을이다. 지금은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지구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두 마을을 모델로 만들어진 '한국의 예술인촌' 경기도 파주시 법흥리 헤이리 예술인 마을도 그런 곳이다. 1997년 계획 설계된 이곳엔 현재 180여명의 예술가들이 살며 작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정체성 덕분에 헤이리는 '첫눈이 오면 첫눈이 온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친목모임을 갖는' 보기 드문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건축가 김종대(51·디자인연구소 이선 대표)씨가 최근 설계한 헤이리 '백농 스튜디오'는 이런 바탕 위에 태어난 집이다. 건축주이자 건축가의 매형인 서예가 한태상(60·대학 교수)씨는 지난해 초 서울 강남권 아파트 생활을 접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장성한 두 자녀와 함께 생활할 '은퇴 후 집'을 구상하다 자연스럽게 헤이리를 떠올렸다. 그가 바라는 건 '삶과 예술의 조화'였다. "지금은 제가 학교에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죠. 하지만 은퇴 후엔 나만의 작업실을 가져야 했습니다."

최근 헤이리 집에서 만난 건축가 김씨는 "공적 공간인 작업실과 사적 공간인 집을 균형 있게 배치하는 게 숙제였다"며 "1층에 건축주의 작업실과 서재를 배치해 개방감을 주고, 2층에 사적 공간인 침실과 주방, 거실을 배치했다"고 했다. "헤이리 마을은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오픈 스튜디오(작업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것) 프로젝트가 수시로 벌어져요. 공적 공간은 더욱 과감하게, 사적 공간은 더욱 은밀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죠."

건축가 김종대씨가 누나 가족을 위해 설계한 경기도 파주 헤이리‘백농 스튜디오’. 서예가인 건축주를 위해 1층은 개방감 있는 스튜디오, 2층은 사적인 주거공간으로 만들었다. 두 동 중 서쪽(사진 왼쪽)동 외관은 청동으로, 동쪽(오른쪽)동 외관은 원목으로 마감해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사진가 변종석
건축주의 호를 딴 '백농 스튜디오'의 가장 큰 특징은 집이 마치 건축주 작품을 닮았다는 점. 한글의 자·모음을 풀어헤쳐 '서예의 현대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 교수의 작품처럼 이 집은 거대한 한글 자음 'ㅅ(시옷)'자 모양으로 터를 잡았다. 날개처럼 뻗은 두 개 동을 연결하는 '가운데 꼭짓점'은 이른바 '바람의 골'. 북쪽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남쪽 앞마당으로 통과하는 골짜기 역할을 한다고 한다. 건축가는 "두 개 동을 연결하되 '바람의 골'로 숨통이 트이게 했다. 비움과 채움을 조화시켜야 하는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바람의 골'을 사이에 둔 두 개 동의 질감도 대조적이다. 건축주의 스튜디오와 후정(後庭)이 위치한 서쪽 동은 빛바랜 듯한 청동으로, 건축주 서재와 게스트하우스가 위치한 동쪽 동은 따스한 이뻬 원목으로 다르게 마감했다. 외관 디자인 역시 'ㄹ(리을)' 'ㄷ(디귿)' 같은 자음에서 본뜬 것처럼 보인다. "청동은 매우 견고한 소재로 시간이 갈수록 빛이 바래 고색창연하게 보이는 장점이 있죠. 색감도 독특해 예술가 집다운 개성을 연출합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나무동 2층은 자녀 중 한 명인 딸의 방이다. 집 뒤편 공원과 연결돼 별장 같은 느낌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청동동 2층은 부부 침실이다.
수시로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에 대비해 1층 스튜디오는 사방을 통창으로 마감해 자연을 한껏 끌어들였다. 20여평 남짓한 이곳에서 한 교수는 먹을 뿌리고 붓을 칠하고 색을 입힌다. 건축가는 "원래 스튜디오와 갤러리를 분리하려고 했지만 공간적 제약으로 그러지 못했다"며 "대신 작업실 통창에 언제든지 갤러리 벽을 뗐다 붙일 수 있게 했다"고 했다. 서재와 스튜디오 뒤쪽 후정에선 실내에서 할 수 없는 스프레이와 물감 작업을 할 수 있다.

청동동과 나무동을 잇는 꼭짓점‘바람의 골’.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이곳을 통한다. 뒤편으로 또 다른 작업 공간인 후정이 보인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된 집은 수직이 아닌, 산의 경사를 타고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모양새로 들어섰다. 각 층 바닥이 전부 지면에 닿도록 산비탈을 따라 설계했다. 건축가는 "자녀 중 한 명의 방은 뒤편 공원과 연결해 별장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연면적 약 400㎡(120여평), 평당 공사비는 450여만원 들었다.

원래 네 식구가 살 집으로 계획했지만, 한 교수는 설계 도중 '장모님 방을 넣어달라'며 건축가에게 요청했다. 장모님 방은 가장 전망 좋은 2층 남쪽에 있다. 한 교수는 "집을 설계하던 도중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혼자 되신 장모님을 모셔왔다"고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가장 후회되는 게 미처 효를 다하지 못한 사실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죠. 이렇게 한 공간에서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분이 계신다는 게 전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