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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선생시육수容軒先生詩六首

yellowday 2011. 3. 24. 19:25

용헌선생시육수容軒先生詩六首

             작자作者 : 용헌 이 원容軒 李 原

             번역飜譯 : 청계 조면희淸溪 趙冕熙

             출전出典 : <용헌선생문집容軒先生文集>

(一) 사천도중沙川道中

사천현재적성방, 산옹동서수목황.

沙川縣在積城傍。山擁東西樹木荒。

응접편참번취렴, 분치미견무농상.

應接偏慙煩聚斂。奔馳未見務農桑。

계변초색연조우, 운외종성욕석양.

溪邊草色連朝雨。雲外鍾聲欲夕陽。

자소정부무가일, 공령아마독현황.

自笑征夫無暇日。空令我馬獨玄黃。

*해설 : 사천현을 지나며

사천 고을은 적성 고을과 가까이 있는데

동서엔 산이둘렀고 수목들은 황폐하였네.

상대해 보니 세금 거두는 일 번거로워 부끄럽구나,

돌아다녀 보아도 농사 힘쓰는 일 보지 못하겠으니.

시냇가 풀빛은 아직 아침의 빗기를 머금었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석양을 알리네.

이렇게 돌아다니느라 여가가 없어서

나의 말만 홀로 생병이 나서 우습네.

(二) 대동강주중大同江舟中

조천석하범난주, 여객휴호작승유.

朝天石下泛蘭舟。與客携壺作勝遊。

제상영회평양로, 임단은영영명루.

堤上?回平壤路。林端隱映永明樓。

중류잉득창주취, 종일도무진세우.

中流剩得滄洲趣。終日都無塵世憂。

종목빙회환태식, 연광강수공유유.

縱目騁懷還太息。年光江水共悠悠。

*해설 : 대동강에 배타고 노닐며

조천석 아래에 아름다운 배 띄우고

손님과 술을 나누며 즐겁게 노니네.

언덕위엔 평양 길들이 이리저리 뻗었고

숲 가엔 영명루가 숨었다 보였다 하네.

물 가운데서 창주신선 놀이를 체험하며

온 종일 속세의 근심이라곤 없어졌다네.

먼곳을 향하여 바라보며 한스러운 것은

세월과 강물 끝 없이 흘러 가는 것일세.

(三) 야설夜雪。丙戌十一月二十日。

서봉한일모, 만리동운응.

西峯寒日暮。萬里凍雲凝。

창외삼동설, 상두반야등.

?外三冬雪。床頭半夜燈。

옹금전사철, 가필갱생빙.

擁衾全似鐵。呵筆更生氷。

욕향양원취, 기여주가증.

欲向梁園醉。其如酒價增。

*해설 : 밤에 눈 옴. 병술년(1406년, 태종6년, 작자 68세) 11월 20일.

추운 날 서쪽 산봉우리 해저무니

만리에 얼음 같은 구름 엉기었네.

창 밖에는 삼동에 쌓인 눈이 있고

상머리에는 밤중까지 등불을 켰네.

이불을 뒤집어쓰나 쇠붙이처럼 차갑고

언 붓을 입김으로 녹이지만 다시 얼었네.

양원같은 동산에 가서 실컷 취하고 싶으나

술 값이 너무 비싼 데야 어떻게 할 것인가.

*양원梁園 : 서한(西漢)의 양 효왕(梁孝王) 유무(劉武)가 대나무 우거지고 호사스런 자신의 원림(園林)인 양원에서 세모(歲暮)에 사마상여(司馬相如), 매승(枚乘), 추양(鄒陽) 등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놀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먼저 시를 짓고는 간찰(簡札)을 주면서 사마상여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진(晉)나라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四) 유거즉사幽居卽事

청신관즐대오사, 좌차모자일각와.

淸晨?櫛戴烏紗。坐此茅茨一殼蝸。

주적조상의유우, 설표정수작비화.

酒滴槽床疑有雨。雪飄庭樹作飛花。

명창점필잉제구, 벽간고수자전다.

明?點筆仍題句。碧澗敲氷自煎茶。

객지종진환폐호, 연래과나애무화.

客至從嗔還閉戶。年來過懶愛無譁。

*해설 : 깊숙이 숨어살며 본 것을 씀

새벽에 세수하고 검은 비단모자 쓴 뒤

이 달팽이 같은 조그만 초가에 앉았네.

거름 판에 걸러지는 술이 마치 비와 같고,

정원수에 흩날리는 눈은 날으는 꽃이 됐네.

밝은 창안에서 붓을 적시어 시구를 쓰고

푸른 개울에 얼음을 깨어서 차를 끓이네.

손님이 와서 성을 내든 말든 문을 닫아두니

일년 내내 너무 게을러져 조용함만 좋아하네.

(五) 용전운用前韻。정춘정呈春亭。

풍발발겁경사, 환로구구등전와.

朔風發發怯輕紗。宦路區區等戰蝸。

오도자비사욕염, 군시증몽필생화.

吾道自悲絲欲染。君詩曾夢筆生花。

병여최양두릉서, 수각잉전간의다.

病餘催釀杜陵黍。睡覺仍煎諫議茶。

적설영정인적적, 치아색반독훤화.

積雪盈庭人寂寂。癡兒索飯獨喧?。

*해설 : 앞의 운을 써서 춘정(변계량)에게 드림

싸늘한 북풍같은 인심 낮은 벼슬아치들 겁나나

벼슬 길의 세세한 것은 달팽이 뿔의 싸움 같지.

우리 학문은 흰 실에 물감 드는 것 같아 슬프지만,

그대의 시는 꿈에 붓이 꽃피는 것 본 듯 좋아지네,

병이 낳고는 두보처럼 기장술 빚는 것을 독촉하고

잠에서 깨어 나면 노동처럼 간의차를 닳혀 마시네.

눈이 한 자씩이나 쌓인 뜰엔 사람 자취 적막하나

어린아이놈 밥 달라고 혼자서 야단스레 보챈다네.

*낱말

1.사욕염絲欲染 : 묵자墨子의 묵비사염墨悲絲染에서 온 말, 곧 흰실이 물감에 따라 바뀌어짐을 슬퍼한 데서 따옴

2.필생화筆生花 : 생화필生花筆에서 따옴. 이백(李白) 이 꿈에 붓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고서 이로부터 재주가 날마다 진보되었다고 함. 출전 : 개천유사(開天遺事) 》

3,두릉서杜陵黍 : 두보가 쓴 시의 ‘쇠년최양서衰年催釀黍’에서 인용함.

4.간의차諫議茶 : 당唐나라 시인 노동盧仝의 시 중에 ‘주필사맹간의신차走筆謝孟諫議新茶’의 시가 유명함.

(六) 하부원군수연賀府院君壽宴

--永樂丁亥。駕幸驪興府閔霽第。許令后妃輦至。講家人之禮。府院君大夫人。俱壽考康寧。以承榮養。與領議政獨谷成公賦詩以賀。-- 補遺

조선음덕격민창, 개부여흥적길강.

祖先陰德格旻蒼。開府驪興迪吉康。

울울간송함만취, 왕왕피수담추황.

鬱鬱澗松含?翠。汪汪陂水淡秋潢。

연거동소중부석, 가난친림위거상.

燕居洞掃重敷席。鸞駕親臨爲擧觴。

열시외손개무양, 본지천세작군왕.

列侍外孫皆撫養。本支千歲作君王.

*해설 : 부원군의 수연에 축하함(아래의 제목을 줄인 것임)

--영락 정해년(1407년, 태종7년, 작자 69세)에 어가가 여흥부 민재의 집에 행차하였는데 후비들도 함께 데려가서 집안 식구의 예로 축하하도록 허락하였다. 부원군의 어머니도 모두 오래 살고 강령함으로써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은 것이다. 영의정 독곡 성공(성석린)과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빠졌던 것을 찾아 보충함.

조상의 음덕이 하늘을 감동 시키어

개부인 여흥에서 길한 일 맞이했네.

울창한 시냇가 솔은 늦게까지 푸르고

둑 안에 가득한 물은 가을 맞아 맑네.

평소에 살고 있던 동네 쓸고 자리 정돈하니

임금 행차 친히 납시어 축하 술을 들어주네.

널어 서 있는 외손들 모두 어루만져 주니

본손과 지손들 천년만년 군왕이 태어나리.

*낱말

1.민제 [閔霽, 1339~1408]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태종의 국구(國舅).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에 걸쳐 전공·예의 판서, 개성윤상의밀직사사, 한양부윤 등을 지냈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영례조사·문하우정승이 되었다. 태종 때 국구로서 여흥백에 봉해졌다.

2.개부開府 : 고려시대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벼슬이 있는데, 뒤에 삼공三公과 같은 뜻으로 가장 높은 벼슬을 지칭함.

이원 [李原, 1368~1429] 본관은 고성(固城). 자 차산(次山). 호 용헌(容軒). 시호 양헌(襄憲). 고려말 서법의 일가를 이룬 행촌(杏村) 이암(李?)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이강(李岡)의 아들이다. 매형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에게서 글을 배웠고 1382년(우왕 8)에 15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385년(우왕 11)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복시승(司僕寺丞)에 등용되고 공조·예조의 좌랑,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 후 지평이 되었고 정종 때 좌승지에 올랐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도운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대사헌·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1403년(태종 3)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후 평양부윤(平壤府尹)·중군총제(中軍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대사헌(大司憲)·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역임하였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에 이어 대사헌·병조판서·의정부참찬(參贊)·찬성사를 거쳐 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1422년(세종 4) 좌의정에 올랐으나 1426년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여산(礪山)에 귀양가 병사하였다. 문집에 《용헌집(容軒集)》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등이 있다. 1790년(정조 14)에 경상도 청도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배향되었다가 1836년(헌종 3)에 안동의 명호서원(明湖書院)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