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57] 뒤틀리고 일그러진 욕망의 자화상

yellowday 2012. 4. 4. 01:14

수많은 미술가가 자화상을 남겼지만, 누구도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처럼 메마르고 수척한 나체(裸體)의 자화상을 통해 뒤틀리고 일그러진 욕망의 치부를 노출한 적이 없다. 실레는 자기의 몸에 대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연민마저 없어 보인다. 마치 날카로운 펜 끝으로 내려치듯 거칠게 그려진 그의 몸은 오직 혐오와 공포, 처벌과 자책의 대상일 뿐이었다.

오스트리아 화가 실레에게 육체적 욕망은 죽음과 고통의 전초였다. 그가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매독으로 고통받다 미치광이처럼 죽어갔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까지도 성욕은 죄악시되었고, 사람들은 매독과 자위행위가 광기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실레에겐 사춘기를 맞아 성에 눈을 뜨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듬어 줄 틈도 없이, 다만 두려워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레의 '자화상' - 1910년, 종이에 과슈·수채·목탄·연필, 42.5×29.5cm, 개인 소장.
불편한 자세로 선 채 불안에 가득한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는 실레의 왜곡된 자화상은 본능에 이끌려 성과 자위에 탐닉했던 스스로에 대한 처벌과 자책의 증거다.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은 성적인 욕망을 다루었으되 에로틱하다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하다. 파격적인 그림으로 늘 비난에 시달리던 실레는 결혼 이후 비교적 평탄하게 살았다. 그러나 1918년 임신 중이던 부인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고, 실레는 그 후 사흘 동안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다 같은 병으로 죽었다. 고작 28세였다. 만약 아기가 태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면 그토록 누추하기 그지없던 자기 몸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기적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아마도 안온하고 부드러운 실레의 자화상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