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제주도… 수선화… 그 향기가 아득할 정도로 짙다

yellowday 2012. 3. 12. 22:58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유채보다 먼저 봄을 기다린다

봄은 남쪽에서 온다. 남쪽이라면 제주도. 제주도의 봄꽃으로는 유채가 유명하지만, 사실 제주에는 유채보다 먼저 피어나 봄을 기다리는 꽃이 있다. 수선화다. 수선화는 겨울이 반환점을 돈 1월 하순부터 피어나기 시작해 2월이면 고혹한 자태를 뽐낸다. 그렇게 겨우내 언 땅을 꼿꼿하게 지키던 수선화는 춘삼월이 되면 노란 유채꽃과 봄의 전령 역할을 교대한다. 한겨울부터 애타게 기다리던 봄이 오면 그 햇살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지는, 어찌 보면 애석한 꽃이다.

꽃을 피우다…고개를 떨구다

제주에 내린 봄비에 말갛게 얼굴을 씻은 수선화가 검은 현무암 돌담 앞에서 봄바람에 실랑대고 있다. 제주의 수선화는 겨울의 한복판에 피어나 봄이 올 때까지 제주의 길가와 돌담 밑을 지킨다. 누렇게 마른 겨울 풀숲 사이에서 홀로 푸른 줄기를 뻗어낸 뒤, 젓가락만큼 얇은 줄기 끝에 네댓 송이 꽃봉오리를 한 움큼 피워낸다.

제주에서 수선화를 보려면 대정(大靜)읍으로 가야 한다. 1840년(헌종 6년) 55세의 추사 김정희가 모함을 받고 유배를 왔던 곳이다. 이름난 관광지라기보다는 제주의 소박한 마을 중 하나인 대정읍에서는 검은 현무암 돌담 아래나 좁다란 시골길 옆 누렇게 마른 풀섶에서 수선화가 솟아오른다.

수선화는 줄기만 보면 난(蘭)과 비슷하게 생겼다. 녹색 줄기가 일자로 매끈하게 뻗어나, 청초한 느낌을 준다. 이들 줄기 사이에서 젓가락 굵기의 대가 솟고, 그 끝에 네댓 송이 꽃이 달린다. 꽃에서는 아카시아 꽃과 풍란을 닮은 향기가 풍겨나온다. 벌과 나비가 없는 겨울에 꽃가루를 옮겨줄 매개체를 유혹해야 하는 비정한 운명 때문인지, 그 향기가 아득할 정도로 짙다. 한줄기를 꺾어 차 안에 놓으면 처음에는 달콤하던 향기도 5분이면 어지럽게 느껴질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줄기와 꽃대를 시원하게 뻗어 올리며 시종일관 꼿꼿하던 수선화도 꽃망울을 터뜨릴 때는 고개를 숙인다. 꽃이 바닥을 향하는 이 모습을 두고 그리스 신화는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나르시스로 표현했다.

사실 제주에 피어나는 수선화는 두 종류다. 제주 토속어로 '몰마농'이라고 하는 것과 '금잔옥대(金盞玉臺)'라고 부르는 종류다. 몰마농에 대해서는 '말이 먹는 마농(마늘)'이라서 이름붙었다는 이도 있고, 마농뿌리처럼 생겼지만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라는 사람도 있다. 유래야 어찌 됐든 토속어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제주에 수선화가 있었다는 의미다. 몰마농은 흰 꽃잎 위에 여러 개의 노란 꽃잎이 있으며 노란 꽃잎 사이에는 흰 꽃잎이 섞여 있다. 길이나 해안가에 제멋대로 피어나는 수선화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금잔옥대란 꽃 모양이 백옥으로 만든 받침 위에 황금빛 잔이 놓인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금잔옥대를 보면 꽃 안쪽에 술잔 모양으로 노란색 꽃잎이 있고, 바깥에 하얀 꽃잎이 이를 감싸고 있다. 사람들이 정성들여 심어놓은 수선화는 대부분 금잔옥대다.

수선화의 두 풍경, 초가집과 돌담

이 대정읍 일대의 수선화는 170여년 전 추사를 사로잡았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추사는 지인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서 "산과 들, 밭둑 사이가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하고,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것 같다"라고 이곳의 수선화를 예찬했다.

제주 수선화는 봄이 오는 길목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는다. 봄 마중을 나온 듯 수선화가 제주 돌담길을 따라 피었다.

수선화를 그림에 담기도 했고, 수선화를 신선으로 표현한 시도 남겼다.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리정체)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한 점의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도 빼어나구나
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게 되는구나.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추사 적거지(謫居址)에 가면 뜰에 가득한 수선화를 볼 수 있다. 추사 적거지는 추사가 제주로 유배 와서 두 번째로 머물던 강도순의 집터. 추사가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고 ‘추사체’를 완성했다고 알려진 이곳에 2년 전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지붕에 들풀을 올리고 밧줄로 묶어 복원한 옛집이 있는데, 그 집 앞에 수북하게 수선화가 피어있다. 3월이면 꽃이 마르기 시작할 때이지만, 여전히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하다.

추사 적거지가 ‘초가집 수선화의 풍경’이라면,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두모악은 미로처럼 얽힌 ‘돌담 수선화의 풍경’이다. 두모악은 사진작가 김영갑(2005년 작고)씨가 루게릭과 싸우며 2002년 만든 사진 갤러리다. 김씨는 20여년간 제주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을 다니며 담아낸 제주의 풍경을 이곳에 전시해 놓았다. 제주의 오름을 사랑했던 자신의 갤러리에도 한라산의 옛 이름인 ‘두모악’을 따서 이름붙였다.

구상나무와 제주 조릿대가 넓게 펼쳐진 한라산 백록담 남벽 아래쪽 풍경.

이곳 마당에는 성인 남자 허리 높이의 나지막한 돌담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는데, 청초한 수선화가 돌담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봄비가 내리는 날 구부러지는 돌담 한쪽에 서서 보면 봄이 오는 길목을 따라 수선화가 봄 마중을 나간 것처럼 보인다. 두모악 박훈일 관장은 “제주의 수선화는 원래 남쪽 해안가가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중산간 지역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며 “제주 중산간 지역의 농로(農路)를 두모악 앞마당에 표현하면서 수선화도 옮겨 심었다”고 했다.

우연히 마주치는 꽃

꽃 모양이 백옥 받침 위에 올려진 황금빛 잔을 닮았다는‘금잔옥대’.

상춘(賞春)이 짧은 것도 한(恨)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은 수선화의 더 큰 한이다. 제주 봄꽃의 자리는 유채에 내준 지 오래고, 제주에서는 길가에 피어나는 ‘흔한 꽃’으로 여겨진다. 집 근처 담벼락에 수선화 서너 분이 피어있는데도 “수선화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난 수선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오”라고 답하는 주민도 있었다. 170여년 전 추사가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수선화)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합니다”라고 한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들녘에서 야생으로 피어나는‘몰마농’.

사실 수선화의 매력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다. 성산일출봉 계단을 오르다가 잠시 숨돌리는 곳에서 만나기도 하고, 산방산 앞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길가에서 두세 송이 피어난 꽃을 보기도 한다. 제주의 오름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다랑쉬 오름에도 한때 몇 곳의 야생 수선화 군락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여행수첩

◇제주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게 해산물 요리다. 대정읍 인근과 산방산 근처에서 수선화를 즐기며 출출해진 뱃속을 신선한 해산물로 채워보자. 산방산과 송악산을 잇는 해안도로변 음식점들도 좋고, ‘산방산 초가집(064―792―0688)’의 전복해물전골도 맛이 좋다. 가볍게 바다의 맛을 즐기려면 칼칼한 고등어조림이나 전복·새우·조개 등 다양한 해물을 듬뿍 넣은 해물뚝배기를 추천한다. 김영갑갤러리 인근에는 주민들이 추천하는 제주 흑돼지 맛집 ‘제주 길흑돼지(064―782―8898)’가 있다. 오겹살·목살 등 다양한 돼지고기를 숯불에 구운 뒤 묵은지에 싸서 먹는다. 주민들은 살살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흐르는 목살을 청고추를 넣은 멸치젓갈에 찍어 먹는 것을 추천한다.

◇섭지코지에 위치한 휘닉스 아일랜드를 이용하면 제주도의 매력을 총체적으로 즐길 수 있다. 섭지코지는 작은 반도라 3면이 바다인데다 동쪽으론 세계 자연문화유산인 성산 일출봉이 큼직하게 보이고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다 건너 한라산이 우뚝하게 펼쳐진다. 안도 다다오·마리오 보타 등 쟁쟁한 해외 건축 가들의 작품 감상은 물론, 수영·스쿠버다이빙 등 다양한 수상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휘닉스 아일랜드 www.phoenixisland.co.kr, (064)731―7000, 예약 1577―0069.

(위) 칼칼한 양념이 깊이 밴 고등어조림. / (아래)전복·새우·조개 등 해산물의 합창,‘ 전복 뚝배기’.

◇송악산에서 용머리 해안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사진 애호가들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을 절경이다.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도로 한쪽 끝에 있는 현무암 해안가에는 쉴 새 없이 파도가 부서지고 위치에 따라 산방산이나 송악산이 보이기도 한다. 송악산 쪽으로는 일제강점기 일본군들이 해안가 절벽에 파놓은 진지굴을 배경으로 사진 구도를 잡는 것이 좋고, 반대쪽으로는 바다 한쪽 끝에서 튀어나오는 산방산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도 운치있다. 파도가 흐르는 모습을 잡고 싶다면 해안가에 트라이포드를 받치고 장시간 노출을 주면 된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