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평화비(碑)

yellowday 2011. 12. 16. 09:35

프랑스 투르의 미라보 초등학교 정문 기둥에 석판(石板)이 붙어 있다. '노르베르 크로넨버그 열두 살, 르네 크로넨버그 여섯 살, 에스텔 좀머스타준 여덟 살, 조제프 좀머스타준 열두 살, 폴레트 좀머스타준 다섯 살. 이 학생들은 1942년 6월 투르에서 체포돼 9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그들은 나치 독일과 프랑스 비시 정권의 법에 따라 독가스실에서 처형됐다. 그들이 유태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치 독일은 1942~1944년 프랑스에 살던 유태인 7만6000여명을 강제수용소로 끌고갔다. 2005년부터 프랑스의 모든 학교는 재학 중에 학살된 것으로 확인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석판을 붙여왔다. 학교 정문이나 담을 비석(碑石)으로 삼는 석판의 마지막 문장은 반드시 대문자로 '그들이 유태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라고 쓴다.

▶수식(修飾)을 버리고 사실만 기록한 비문일수록 뭉클한 울림을 남긴다. 파리 개선문에는 1차대전 때 전사한 어느 무명용사 무덤이 있다. 비문엔 '조국을 위해 숨진 한 프랑스 병사가 여기 잠들어 있다'라고만 적혀 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장된 어느 무명 병사의 비문은 '이름도 계급도 모르는 한 영국군 병사가 이 돌 밑에 누워 있다'라고 썼다.

▶지난 14일 낮 12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1000번째 수요 집회를 열었다. 할머니들은 시민 성금으로 만든 '평화비(平和碑)'를 대사관 맞은편에 세웠다. 손을 무릎에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소녀 동상이다. 평화비의 돌바닥엔 한국어와 영어·일본어 비문이 새겨졌다. '1992년 1월 8일부터 이곳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가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운다.'

▶일본 정부는 평화비 철거를 요구했다. 우리 외교부는 "평화비 건립은 일본 정부의 책임있는 문제 해결과 명예회복을 촉구해온 피해자들의 간절함을 반영한 것"이라며 거절했다. 19년 11개월이나 수요 집회가 열리는 동안 234명의 할머니 중에 171명이 세상을 뜨고 63명만 남았다. 한 문장짜리 비문엔 할머니들의 맺힌 한(恨)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일본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평화비를 보면서 전쟁 범죄를 반성하고 할머니들의 피눈물을 진심으로 닦아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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