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일장기를 보거나 정신대의 '정'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1991년 8월 종군위안부 출신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할머니는 17세 때 일본군 성 노리개로 끌려가 하루 4~5명을 상대해야 했던 끔찍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일본이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잡아떼던 시절이었다. 피해 당사자인 김 할머니의 증언 덕에 역사의 암흑 속에 묻혀버릴 뻔한 반세기 전 일제 만행이 물 위로 떠올랐다.
▶그 직후 '흰 옷고름 입에 물고'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종군위안부 15명의 증언집 내용은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폭행을 당한 뒤 아랫배가 너무 아파 걷지도 못했습니다" "공습이 한창일 때도 위안소 앞에는 군인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들은 조선말을 했다는 이유로 친구의 목을 잘랐습니다"…. 할머니들은 "사죄와 보상이 실현돼 한이 풀리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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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8일 수요일,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였다. 할머니들은 며칠 뒤 방한하는 미야자와 일본 총리에게 일본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일본 총리가 말로만 하는 사과뿐이었다.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 모여 집회를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19년 11개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열린 수요 집회가 오늘 14일로 1000회를 맞는다. 할머니들의 분노의 목소리는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으며 일본의 성(性) 만행을 고발하는 마당이 됐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꿈쩍도 않고 있다. 7회 모임에 처음 나와 여든일곱 된 지금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는 김복동 할머니는 "이리 오래 걸릴 끼라고는 처음에는 생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모임을 건너뛴 것은 딱 한 번, 일본 고베 대지진 때였다. 올봄 동일본 쓰나미 참사 때는 침묵 모임을 가졌다. 수요 집회 시작 당시 234명이던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동안 노환으로 171명이 세상을 뜨고 63명만 남았다. 남은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86세. 올해만 16명이 별세할 만큼 할머니들이 세상을 뜨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일본이 노리는 게 이런 것일까.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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