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면죄부

yellowday 2011. 11. 29. 17:10

2009년 천주교 뉴욕 브루클린교구는 어떤 신자든 교구 내 성당 여섯 곳 중 한 곳에 가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단, 고해성사를 하고, 성찬식을 치르고, 교황을 위한 기도를 하고, 앞으로 절대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면죄부 발급은 미국 동부 쪽 대도시에서 활발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천년을 축하하려고 주교들에게 면죄부 발급 권한을 줬고 뒤를 이은 베네딕토 16세는 더 적극적이었다.

미국 천주교가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활성화하려고 옛 전통을 되살리자 그곳 언론은 물론 한국 언론도 '미국 가톨릭에 면죄부가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면죄부(免罪符)'가 아니라 '대사(大赦)'라는 표현이 맞다고 정정을 요청했다. 가톨릭 신자는 면죄부가 아닌 오직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으며, 면죄부는 죄에 대한 벌을 사면해주는 대사의 오역(誤譯)일 뿐이라고 했다.

▶올봄에도 신문들이 '유럽 종교개혁 500주년' 기사를 실으면서 중세 교회를 묘사한 대목에 면죄부라는 표현을 쓰자 주교회의가 다시 지적했다. 대사는 벌을 용서해주지만 죄 자체를 없애는 효력은 없기 때문에 '대사'를 '면죄부'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일본에서는 '면벌(免罰)' '면상(免償)'이라는 표현을 쓴다. 엊그제 주교회의에서는 교과서도 면죄부를 대사로 고쳐야한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광부 아들이었던 신학박사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대학 교회 정문에 '95개 조 반박문'이라는 문서를 내붙였다. 돈을 받고 벌을 감해주는 면죄부 판매 같은 교회 비리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중세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어서 루터의 글은 독일은 물론 유럽을 흔들었다. 중세 교회가 면죄부를 남발하며 헌금을 모았던 역사는 여러 번 단죄됐고 지금도 부끄러운 과거로 남아 있다.

▶오늘날 면죄부는 종교 용어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용어로 훨씬 많이 쓰인다. 범죄 피의자로 몰려 있던 사람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하면 "사법부는 면죄부만 주려는 것이냐"는 쓴소리가 나온다. 일부 사전은 종교적 의미로 쓸 때 이미 '면죄부'를 '면벌부'라고 하고 있지만, 비종교적으로 쓰이는 비유적 표현까지 솎아내려면 세월이 걸릴 것 같다. 오역은 단죄하더라도 '굳어진 표현'에는 너그러운 면죄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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