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 국보순례

[122] 왕세자 치유 십장생병풍

yellowday 2011. 8. 12. 14:59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십장생병풍을 많이 제작하였다. 왕과 왕비의 내전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옥외 행사를 위해 항시 여러 틀이 상비되어 있었다. 왕실의 혼례나 환갑 같은 큰 잔치 때는 그 행사를 위해서 별도로 새 십장생병풍을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제법 여러 틀이 전해져 현재 알려진 것이 20점 정도 된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불발기창이 나 있는 실내 장식용만도 10여 점 남아 있다.

이 십장생병풍들은 거의 똑같은 도상의 청록진채화(靑綠眞彩畵)로 대개 19세기 작품이다. 시대가 오랜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실제로 사용했던 장식 병풍이기 때문에 낡으면 새로 제작하며 계속 교체했고, 이 때문에 왕조 말기에 남아 있던 것만이 전해지는 것이다.

본래 궁중의 십장생병풍은 민간에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이왕가(李王家) 유물'로 전락되고 관리가 허술한 틈에 외부로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 한동안 십장생병풍은 장식 그림이라고 해서 본격적인 회화작품보다 예술성이 낮게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일찍부터 한국적 특색이 강한 이 왕실 유물에 주목했다. 미국 오리건대 박물관의 십장생병풍(사진, 부분)은 1924년에 서울에 있던 테일러 무역상회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병풍은 특이하게도 8폭의 십장생 그림에 별도로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 등 13명의 좌목(座目;이름과 관직)이 2폭 붙어 있다. 박본수 학예연구사(경기도박물관)는 이 인물들은 고종 16년(1879), 6세 나이의 왕세자(순종)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 치료를 맡았던 의약청의 관리들임을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했다. 왕세자의 병이 완치되자 이를 경하하면서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며 그린 기념화로 그 제작 동기를 명확히 알려주는 유일한 십장생병풍이다. 그러나 본래 궁중장식화에는 화원의 낙관이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화가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