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년)에 일어난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외교적 보호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것이었지만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그로부터 20년 뒤에 미국·영국·이탈리아·러시아에 뒤이어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1886년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이루어진 2년 뒤 민속학자인 샤를르 바라(Charlers Varat·1842~1893)의 문화탐사단이 한국에 와서 문화재를 수집해 갔다. 프랑스 정부(문화예술부)가 지원한 바라 탐사단은 파리의 한 부유한 시민이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탐사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최초의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였던 플랑쉬는 "한 프랑스 여행자가 희귀한 물건을 구입하려고 공사관에서 기다린다"는 소문을 퍼트려 유물을 수집했다. 바라 탐사단의 수집품은 현재 파리의 국립 기메(Guimet) 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 천수관음상
바라 탐사단의 수집품은 매우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30여점의 불상은 국내에도 없는 희귀한 것이 많다. 높이 58cm의 철조(鐵造)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은 고려시대 유행한 전형적인 밀교(密敎) 불상이다.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은 손이 천 개, 눈이 천 개여서 천수천안이라고도 하는데 이 불상은 왼손 20개, 오른손 21개로 이를 상징했다. 손에는 경전·보검·정병·법륜 등을 지니고 있고, 머리 위로는 화불(化佛)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관세음보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철불임에도 합장(合掌)한 양손을 포함해 모두 43개의 팔뚝이 저마다의 명확한 자세를 정교히 나타내어 복잡한 밀교 도상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상호(相好:얼굴)는 유순한 현세적 인상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고려불이다. 나무로 만든 받침대 밑바닥에는 묵서로 발원문이 쓰여 있는데 상주에 있던 동방사(東方寺) 암주(庵主)가 발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원나라를 통하여 티베트의 밀교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런 전형적인 밀교 불상은 국내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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