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일제강점기에 그린 ‘무인(武人) 초상화’의 주인공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수채화(56×78㎝)는 파란색 옷을 입은 한 무인이 머리에 전립을 쓰고, 등채(채찍의 일종)를 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뒷면 병풍에는 거북선 8척, 판옥선 추정 전선 5척, 작은 배 5척이 그려져 있다. 거북선 중에는 흰색으로 그려진 것도 2척이 있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는 1919년 3·1운동 직후 한국에 처음 들어왔고, 그 후 1936년까지 수차례 방문해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 키스의 한국 관련 책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키스, 동양의 창을 열다>를 번역한 송영달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대학교 명예교수는 키스의 이 ‘무인 초상화’를 최근 입수했다. 이 그림은 그동안 키스의 조카인 애너벨 베러티가 소장해왔다. <키스, 동양의 창을 열다> 번역판에는 송 교수가 붙인 부록에 키스의 그림들이 나열돼 있는데, 이 그림은 ‘청포를 입은 무관’으로 소개돼 있다.
송 교수는 최근 e메일을 통해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씨에게 충무공 초상화 진위 여부를 문의했다. <난중일기>(글항아리)를 국역한 박 연구가는 일제시대 사라진 이순신 초상화를 그동안 추적해왔다. 박 연구가는 “초상화 주인공의 얼굴 모습, 앉은 자세, 배경 병풍을 볼 때 조선 후기에 남해안 통영 등지에 남아있던 이순신 장군 초상화의 한 종류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키스가 당시 존재했던 이순신 초상화를 본 후 이를 화폭에 옮겨 그렸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남아있던 초상화는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바로 제작한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이순신 장군의 실물과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모두 사라졌다.
조선 후기 이순신 초상화 보고 그린 작품
박 연구가는 키스의 수채화가 청전 이상범 화백의 초상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 화백이 그린 이순신 그림은 현충사 봉안 초상화(지금은 소재 확인 불명), 해군사관학교 소장 초상화, 1930년대 <동아일보> 이광수 연재소설 <이순신>에 실린 초상화가 있다. 이 화백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해안 일대에 남아있던 이순신 초상화를 찾아다녔다. 박 연구가는 “이 화백의 옛날 인터뷰를 보면 키스의 그림과 이 화백 그림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1936년 8월 1일 <삼천리>(제8권 제8호)와의 인터뷰에서 “이순신의 초상을 보았는데 일반 현대인이 생각하는 명장의 타입을 가진 장군의 얼굴로 보이지 않더군요”라면서 “그래서 얼굴에다 살도 붙이고 수염도 힘있게 붙여 놓고 여러 가지로 만들어 놓았지요”라고 답했다.
이 화백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얼굴보다 다소 살이 붙은 모습이다. 박 연구가는 “키스의 초상화에서 살을 찌우고, 수염을 (원래 그림보다) 더 붙이면 이 화백의 그림과 거의 같은 모습”이라면서 “얼굴 형태, 눈썹과 눈매, 귀 모양, 콧등과 콧날도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박 연구가는 “두 초상화의 구도와 머리 위의 전립, 의자, 등채의 형태, 손 모양, 발 모양도 일치한다”면서 “다만 무인 복식에서 구군복의 색깔과 허리띠가 다르고 거북선 배경 병풍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키스와 이 화백이 당시에 존재했던, 동일한 이순신 장군 초상화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남해안 지역의 초상화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백은 1965년 4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듬해(1932년) 봄 나는 송진우 사장으로부터 아산 현충사에 모실 충무공의 영정을 그리라는 지시를 받았다”면서 “한산도의 제승당에 있는 영정을 직접 답사, 소형의 수채로 그려진 영정을 사본(寫本·베껴 그린 그림)해 오기도 하고, 통영·여수 등지를 다니면서 사당에 모신 충무공의 영정들을 몇 점 보고 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뒷배경의 거북선도 이순신 가능성 높여
키스 초상화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초상화는 이 화백이 사본해 왔다고 한 한산도 제승당의 수채화다. 제승당 수채화는 경남 통영 착량묘의 초상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박 연구가의 주장이다. 착량묘는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 수군과 인근 백성들이 세웠고 이때 초상화가 봉안됐다. 이순신 장군 당대에 그린 초상화였기 때문에 충무공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초상화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키스의 한국 관련 작품을 수집하고 소개해온 송영달 교수는 “키스는 상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고 모델이든가 다른 그림을 근거로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키스가 분명 어떤 그림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박 연구가는 “키스의 조선 여행 기록에는 통영이나 한산도·여수 등지를 방문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연구가는 “1920∼1930년대 언론을 살펴보면 서양인들이 한산도로 여름에 피서를 갔다는 기사가 있다”면서 “그곳으로 피서를 갔거나 아니면 한산도가 아닌 곳에서 그림을 직접 봤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가는 <조선일보>의 1928년 4월 28일 기사와 1929년 4월 17일 기사에서 한산도 제승당에 소장된 이순신 장군 초상화를 외국인이 가져갔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뒷배경 병풍에 그려진 거북선과 판옥선 역시 키스가 그린 인물이 이순신 장군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박 연구가는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수군의 훈련 모습을 그린 수군조련도”라면서 “거북선 역시 키스가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1932년 처음 우리나라에 등장한 크리스마스 실은 선교사인 셔우드 홀이 만들었다. 처음 도안은 거북선이었지만 일제의 검열로 남대문으로 교체됐다. 키스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면 홀의 어머니 집에서 기거했고, 키스는 홀과 교류했다. 또 키스의 책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에는 여동생인 로버트슨 스콧의 서문이 실려 있다. 서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도공을 강제로 끌고 간 사실까지 설명돼 있다. 박 연구가는 “키스와 여동생이 이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를 알았다면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1953년에 그린 그림이다.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전문가들 사이에 이순신 장군을 문인으로 박제화한 작품이라는 비판과 함께 실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출처: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