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영의정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yellowday 2018. 4. 23. 06:12

입력 : 2018.04.20 17:02

양평 구정승골의 세번째 이야기는 영의정 문익공 한음 이덕형으로 오성과 한음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바로 그 한음 대감이다.

한음 이덕형 초상화.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음(漢陰)은 광주이씨(廣州李氏)로 6대조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 5대조는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다 조카 이세좌와 함께 사사된 이극균, 증조부는 이수총, 조부는 이진경이다. 지금의 서울 남대문과 필동 사이 성명방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글을 잘 하였다. 소년 시절 포천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삼촌이 영의정 류전이었다. 이때 어린 나이임에도 당대의 문장가인 양사언, 양사준, 양사기 형제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어울렸다. 토정 이지함은 한음의 관상을 보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하고 영의정인 조카 이산해에게 사위 삼으라고 권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한음은 17세에 이산해의 딸인 한산이씨와 결혼한다.
서울 중구 퇴계로 한음 집터. 현재 대우재단 빌딩으로 2017년 앞을 지나는 서울역 고가도로를 걷기 전용으로 꾸민 '서울로7017'이 개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나, 그곳이 한음 이덕형의 집터인 줄 모른다. 건물 2층을 고가도로와 연결하고 Seoullo Terrace로 이름을 바꾸어 커피숍 등 관광객 편의시설을 확충하였다. 사진은 남대문시장 쪽 고가도로 시작점에서 바라본 대우재단 빌딩이다.
한음은 18세에 생원시에 수석,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20세에 문과 별시에 을과로 급제하는데 이때 25세인 오성 이항복은 알성시에 병과로 급제한다. 둘은 이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대제학 이이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다. 오성과 한음의 만남이다. 한음과 오성은 서로 같은 벼슬을 물려주고 받았다. 나이는 한음이 5살 어리지만 벼슬은 조금씩 앞섰고 그 후임을 오성이 받았다.

한음은 31세 때 대제학이 되었는데 조선조 최연소 기록이다. 32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선조의 의주 피난을 수행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등 국난극복에 혼신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한음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고 이후 좌의정이 된다. 그리고 42세 때인 1602년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임해군의 처형과 영창대군의 사사를 반대했다가 삭탈관직 되었다.
부인의 묘에 한음을 합장한 묘. 몇 개의 단을 올라가면 부모 합장묘가 있다. 묘비는 대리석으로 앞면에 ‘영의정문익공한음이선생덕형지묘 증정경부인한산이씨부좌(領議政文翼公漢陰李先生德馨之墓贈貞敬夫人韓山李氏祔左)’라는 명문이 있으며 묘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지었다.
45세 때 모친과 부인의 묘소가 바라다보이는 운길산 수종사 아래에 별서(別墅) 대아당(大雅堂)을 지었다. 52세에 삭탈관직 되어 이곳 용진사재(龍津沙齋)에 머무르면서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운길산에 올라 대궐이 있는 북쪽을 향해 대성통곡하기도 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되어가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니 공(公)의 나이 53세였다.
한음과 부인의 묘 위에 자리 잡은 부모 합장 묘. 내려다보니 앞이 탁 트인 곳이다. 그러나 풍수지리학자들은 이곳이 그다지 명당은 아니라고 하는데, 몇 번 언급한 대로 여기서는 문화유산 답사차 탐방하는 것인지라 풍수지리 측면의 명당 여부는 논외로 한다.
한음은 모친상을 먼저 당하고, 이어 임진왜란 중에 부인상을 당하였다. 이곳 구정승골로 어머니와 부인을 천장하여 모셔온 뒤에 본인이 돌아가셔 부인과 합장 되었고, 부친은 한음보다 5년 후 돌아가셔서 모친과 합장 되었다. 구정승골로 불리우는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골짜기, 김사형과 신효창의 묘에서 십리 가까이 나온 곳에 한음 대감 부모와 부부의 묘가 있으며 묘 아래에 재실과 신도비가 있다.

야사에 의하면 한음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성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곡을 하고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오성은 한음의 시신을 직접 염습해주었다. 그리고 부인 한산 이씨가 먼저 묻힌 자리에 합장으로 장사지냈다.
묘하에 한음 이덕형 재실 쌍송재(雙松齋)가 있다. 삼문에는 한원문(漢原門)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앞쪽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유실된 한산 이씨의 정려문(홍살문)을 참죽나무로 다시 세웠다. 목왕1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건너야 하기에 둥근 모양의 철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좀 더 고졸한 모양의 다리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음의 부인은 영의정 이산해의 둘째 딸로 임진왜란이 나자 시부모가 살고 계시던 강원도 안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선조 25년(1592) 9월 6일, 왜군이 안협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자 산으로 피하였다가 몸을 더럽힐 것을 염려하여 바위에서 뛰어내려 순절(殉節)하였다. 산기슭에 묻혔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선조임금이 절개를 크게 칭송하여 정려문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신도비는 재실에서 조금 더 내려가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건너에 있다. 장방형의 화강암 기대(基臺)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린 것으로 이수 조각이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글을 짓고 오시구(吳始口)가 글씨를 썼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하여 1653년(효종 4)에 건립한 것이다.
한음 이덕형 대감의 외가는 포천이다. 그곳에서 양사언에게 글을 배우면서 40여 년의 나이 차를 넘어 '그대는 나의 적수가 아니라 나의 스승이다'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시적(詩的)으로 양사언과 교우관계(交友關係)를 맺었다고 한다. 그 봉래 양사언이 포천 금수정(金水亭)의 주인 문온공 김구용의 5대손 김윤복의 사위이니 앞서 살펴본 김사형과도 무관하지 않다.
신도비는 접근이 어렵기도 하고, 읽어 이해하기도 어려우니 조상의 위선사업 겸 신도비를 한글로 해석하여 거대한 석판에 새겨 큰길에 세웠다. 비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다. 조형물에 가까운 기념비인데 흔하지 않은 사례이다.
한음을 말할 때 오성을 빼놓을 수 없는데 오성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라면 한음 이덕형은 이산해의 사위이니 관계(官界)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도 컸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한음의 인간적 풍모와 원만한 성품 탓으로 존경받는 것이며, 최고의 자리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느 장수 못지않게 구국에 애쓴 선비로 추앙을 받은 후 마침내 광해의 폐모살제(廢母殺第)에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되어 53년의 생을 마쳤으니 오늘날 광주 이씨를 명문가로 만든 근원이 아닌가 싶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