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2.16 03:01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5>양주동(1903~1977)
와세다大 영문과 졸업 우리 옛시·노래에 심취
영어 가르치는 틈틈이 향가 해독에 몰두
속인으로 잘 포장된 천재, 기억력 아주 뛰어나
영시·한시 줄줄 외우고 방패 모양 延大교표 그려
잘생긴 그의 귀를 보고 장수하리라 믿었는데…
아무와도 다투지 않고 솔직하고 멋진 生 마감
양주동은 개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개성은 경기도 관할이었다. 이후 가족이 모두 황해도로 이주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석헌, 홍종인과 같은 시절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이들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퇴학당해 함석헌은 평안북도 오산학교(현 오산중·고교)로 갔고 양주동은 서울 중동학교(현 중동중·고교)로 적을 옮겼다. 양주동은 졸업 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틀림없는 기인(奇人)이었으나, 사실은 속인(俗人)으로 잘 포장된 천재였고 어떤 면에서는 속인 이하로 행세하기도 했다. 그가 평양고보에 다닐 때 함석헌 등과 함께 일제에 항거했기 때문에 제적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한 번도 사납거나 거친 일에 가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상이 특이했다. 필요 이상으로 크고 잘생긴 귀를 가지고 있었다. 음성은 좀 거칠었고 아름답게 들리진 않았지만 박력 있었다.
그가 젊어서 번역한 영어 시집의 종이는 형편없는 저질이었지만 번역은 모두 주옥같다는 평을 받았다. 그와 더불어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한 연세대 고병려(2006년 작고) 교수는 가끔 양주동에 관해 웃으며 얘기했다. 양주동은 와세다를 마치고 얼마 뒤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영어 교수로 취임했다. 불행히도 일제 말기에 숭실전문뿐 아니라 숭의여학교도 폐교되는 바람에 거기서 가르치던 미국 선교사가 모두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양주동도 면직되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현 경신중·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입에 풀칠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때부터인가 영문학보다 우리나라 옛 시와 노래에 심취했고 특히 향가 해독에 몰두했다. 이미 1930년 '조선의 맥박'이라는 시집을 발간했듯이 그 시대에 나타난 그의 문학적 경향은 한마디로 민족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경신학교에서 같이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고병려 교수에 따르면 양주동은 큰 책을 넣는 딱딱한 종이 케이스에 점심 도시락을 넣어 한여름 방학 내내 학교 도서실에 드나들더니 '조선고가연구'라는 이름의 책을 한 권 출판했다고 한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가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영문학인데,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고려조 가사를 연구해 우리 학계에 남긴 공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해방되고 나서 동국대에서 가르쳤다. 그러다가 1958년 돌연 연세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는데, 짐작하건대 총장 백낙준이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주면서 "이젠 그 대학에서 그만 가르치고 연세대로 오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19가 터지고 연세대학교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얌전하던 교수들도 들고일어나 강의실에서 "총장 나가라" "이사장 물러나라" 하며 농성을 벌이는 추태가 벌어졌다. 그런 파동이 있은 뒤 나는 원두우(언더우드) 설립자 동상이 있는 교정 어느 그늘에서 그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이 벌인 추태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백낙준 총장이 안 계시니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아요"라고 한마디 한 것을 생각할 때, 동국대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양주동이 나에게 "연세대 교표 도안을 내가 만들었어요" 하기에 나는 좀 의아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백 총장이 부탁했던 것 같다. 그가 방패 모양의 연대 교표를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재다능했던 양주동!
그는 1961년 동국대로 돌아가기까지 3년 동안 연세대 학생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교수였다. 기억력이 뛰어나 영시와 한시를 줄줄 외우고, 말을 하도 잘해서 듣는 사람들이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잘하십니까?" 양주동이 대답했다. "내 이름이 양주동 아니냐. 주둥이가 둘이란 뜻이야. 주둥이가 하나인 사람보다 말을 잘해야지!"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했다. 자기 자신을 '국보 1호'라고 불렀다는 말도 들었다. 그 시절 자동차라곤 지프차밖에 없었는데, 타고 가던 지프차 운전기사가 잠깐 실수해 급정거하게 됐다. 차가 덜컥하고 멎었을 때 양주동이 정색하고 기사를 꾸짖었다. "이놈아, 국보가 다칠 뻔하지 않았어!" 방송에 나가면 여러 사람이 같이 출연해도 PD나 아나운서를 불러 "나는 다른 사람보다 출연료를 좀 더 줘야 해"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후 한 아나운서가 "선생님, 다른 분들과 출연료 차이를 좀 두었습니다. 선생님만 따로 가서 받으셔야 합니다. 다른 출연자들이 모르도록 하십시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출연료는 다 같은 액수였지만 그 말에 속아서 신이 나 싱글벙글하던 양주동은 얼마나 순진한 기인이었던가!
양주동은 천재였다. 그는 영국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 와 함께 이렇게 노래했을 것이다. "나 아무와도 다투지 않았거늘/ 그 누구도 나와 다툴 만한 자격이 없었기에." 그렇게 초연한 처지에서 진정 아무와도 다투지 않고 한평생을 살았다. 나는 그의 잘생긴 귀를 보고 백세까지 장수하리라고 믿었는데 그만 75세를 일기로 단순하고 솔직하고 멋진 생을 마감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에게 양주동은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다. 조닷 이철원 기자
그가 젊어서 번역한 영어 시집의 종이는 형편없는 저질이었지만 번역은 모두 주옥같다는 평을 받았다. 그와 더불어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한 연세대 고병려(2006년 작고) 교수는 가끔 양주동에 관해 웃으며 얘기했다. 양주동은 와세다를 마치고 얼마 뒤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영어 교수로 취임했다. 불행히도 일제 말기에 숭실전문뿐 아니라 숭의여학교도 폐교되는 바람에 거기서 가르치던 미국 선교사가 모두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양주동도 면직되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현 경신중·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입에 풀칠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때부터인가 영문학보다 우리나라 옛 시와 노래에 심취했고 특히 향가 해독에 몰두했다. 이미 1930년 '조선의 맥박'이라는 시집을 발간했듯이 그 시대에 나타난 그의 문학적 경향은 한마디로 민족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경신학교에서 같이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고병려 교수에 따르면 양주동은 큰 책을 넣는 딱딱한 종이 케이스에 점심 도시락을 넣어 한여름 방학 내내 학교 도서실에 드나들더니 '조선고가연구'라는 이름의 책을 한 권 출판했다고 한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가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영문학인데,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고려조 가사를 연구해 우리 학계에 남긴 공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해방되고 나서 동국대에서 가르쳤다. 그러다가 1958년 돌연 연세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는데, 짐작하건대 총장 백낙준이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주면서 "이젠 그 대학에서 그만 가르치고 연세대로 오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19가 터지고 연세대학교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얌전하던 교수들도 들고일어나 강의실에서 "총장 나가라" "이사장 물러나라" 하며 농성을 벌이는 추태가 벌어졌다. 그런 파동이 있은 뒤 나는 원두우(언더우드) 설립자 동상이 있는 교정 어느 그늘에서 그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이 벌인 추태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백낙준 총장이 안 계시니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아요"라고 한마디 한 것을 생각할 때, 동국대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양주동이 나에게 "연세대 교표 도안을 내가 만들었어요" 하기에 나는 좀 의아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백 총장이 부탁했던 것 같다. 그가 방패 모양의 연대 교표를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재다능했던 양주동!
그는 1961년 동국대로 돌아가기까지 3년 동안 연세대 학생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교수였다. 기억력이 뛰어나 영시와 한시를 줄줄 외우고, 말을 하도 잘해서 듣는 사람들이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잘하십니까?" 양주동이 대답했다. "내 이름이 양주동 아니냐. 주둥이가 둘이란 뜻이야. 주둥이가 하나인 사람보다 말을 잘해야지!"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했다. 자기 자신을 '국보 1호'라고 불렀다는 말도 들었다. 그 시절 자동차라곤 지프차밖에 없었는데, 타고 가던 지프차 운전기사가 잠깐 실수해 급정거하게 됐다. 차가 덜컥하고 멎었을 때 양주동이 정색하고 기사를 꾸짖었다. "이놈아, 국보가 다칠 뻔하지 않았어!" 방송에 나가면 여러 사람이 같이 출연해도 PD나 아나운서를 불러 "나는 다른 사람보다 출연료를 좀 더 줘야 해"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후 한 아나운서가 "선생님, 다른 분들과 출연료 차이를 좀 두었습니다. 선생님만 따로 가서 받으셔야 합니다. 다른 출연자들이 모르도록 하십시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출연료는 다 같은 액수였지만 그 말에 속아서 신이 나 싱글벙글하던 양주동은 얼마나 순진한 기인이었던가!
양주동은 천재였다. 그는 영국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 와 함께 이렇게 노래했을 것이다. "나 아무와도 다투지 않았거늘/ 그 누구도 나와 다툴 만한 자격이 없었기에." 그렇게 초연한 처지에서 진정 아무와도 다투지 않고 한평생을 살았다. 나는 그의 잘생긴 귀를 보고 백세까지 장수하리라고 믿었는데 그만 75세를 일기로 단순하고 솔직하고 멋진 생을 마감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에게 양주동은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다. 조닷 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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